한일관계 최악 상황서도 ‘일본어문학’ 연구해야 하는 까닭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8일 11시 44분


‘일본문학’을 넘어 ‘일본어문학’으로

도쿄특파원 시절, 사무실의 재일동포 여직원이 해마다 몇 차례는 꼭 조퇴를 신청했다. 이유를 물으니, “집안 제삿날인데 가족들이 전부 모이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약간 놀랐다. 한국에서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나, 그 제사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일동포에게 제사라는 것은 단순한 집안 행사가 아니라 일본 속의 고단한 마이너리티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후세대에 전달하는 ‘엄숙한 의식’이 아닐까 하는. 한국인의 봉제사(奉祭祀)를 연구한다면 재일동포의 그것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문제의식은 더 넓어졌다. 공자 등을 기리는 유교적 제사의식의 전범이라는 석전대제가 오히려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한국만이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거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놀랄 정도로 조국의 옛 풍습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문화나 제도라는 것은 발상지가 오히려 현상변경에 자유롭고, 발상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되레 원형을 중시할지도 모른다는 설익은 가설까지 떠올렸다. 만약 이 가설이 유용하다면 문화의 전파를 시계열로 표시한 동심원 중에서 외곽을 연구하는 것도 원형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15, 16일 고려대 일본연구센터(소장 서승원 교수)가 교내 인촌기념관에서 주최한 ‘세계 일본어문학연구의 현상(現狀)과 전망’이라는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도-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유사한 문제의식을 감지했다. ‘일본문학’이 아니라 ‘일본어문학’이라는 표현에서다.
이 대회를 조직한 고려대 정병호, 유재진 교수의 말을 종합하면 굳이 ‘일본어문학’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렇다.

“문학사란 보통 자국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자료의 선택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보니 빠지는 것이 있다. 일본문학의 경우 일본인이, 일본에서, 일본어로 쓴 것만으로 한정하기 쉽다. 그러나 일본인이 외국에서 일본어로, 한국인이 한국에서 일본어로 쓴 ‘일본어문학’도 좁은 의미의 일본문학을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의 일본문학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게 우리의 시각이다.” 동심원의 중앙만이 아니라 외곽도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문제의식은 최근 ‘중국문학(Chinese literature)’이라는 국가적 개념에서 탈피해 ‘중국어(사용자의) 문학(Sinophone literature)’으로 연구의 외연을 넓히려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인지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미국 독일 프랑스 호주 등 서구의 저명한 일본문학 연구자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들은 자국이 일본문학을 연구하게 된 경위와 성과, 그리고 현황과 전망에 대해 깊이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번역’이라는 키워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다만 일본의 지배를 경험한 한국 중국 대만이 서구에 비해 ‘일본어문학’이라는 개념이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이 논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병호 교수가 일본강점기에 조선인 작가가 쓴 일본어 작품을 간단하게 ‘친일문학’으로 치부하지 않고 ‘이중언어문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규정하려는 움직임이 국내 학계에서 등장한 사실을 비중 있게 소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듀크대의 레오 칭 교수는 대만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의 끝물을 경험했던 세대는 ‘도상’(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토상(とうさん)에서 유래)으로 불린다고 소개하면서, 그들의 저작물을 통해 그들 세대의 심리상태를 소개했다. ‘도상 세대’가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강점기를 매우 긍정적이고,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특이하다. 레오 교수는 이런 심리상태를 ‘노스탤지어 모드’라고 명명했다.

대만 푸런(輔仁)대의 요코지 게이코(橫路啓子) 교수는 “대만에서 일본문학은 일본인이 일본에서 쓴 문학이고, 일본어문학은 대만사람이 일본어로 쓴 문학울 가리킨다”며 일본어문학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통치시대에 쓰인 작품군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베이징사범대의 왕즈쑹(王志松) 교수는 불행했던 중일관계나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나 연구 동향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도 1990년대 식민지문학연구의 진전에 따라 일본어 작품에 관한 연구는 일본 국내에서 동아시아로 확장됐다고 지적했다. 근대에 형성된 좁은 의미의 ‘일본문학’의 개념은 해체되고 ‘일본문학’의 외연이 ‘일본어문학’으로 넓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외국어로 번역된 일본문학을 ‘또 하나의 일본문학’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번역작품을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독립체로 보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대체로 서구는 잘 알지 못하는 ‘옆동네’가 궁금해 일본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한국 중국 대만은 ‘옆동네’가 아니라 매일 부대끼고 사는 바로 ‘옆집’, 또는 한 지붕 밑에 사는 ‘옆방’을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려대 일본연구센터는 ‘일본문학’의 범주를 ‘일본어문학’으로 확장하는 것이 연구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온 듯하다. 방대한 자료총서를 통해서다. 센터는 최근 몇 년 사이에 40권짜리 ‘한반도·만주 일본어문헌(1868~1945) 목록집/목차집’을, 45권짜리 ‘한반도·중국만주지역 간행 일본 전통시가 자료집’을, 18권짜리 ‘근대 초기 한반도 간행 일본어잡지 자료집’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았다. 이들 작업은 자료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개화기에서 일본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일본이 아닌 한반도와 만주 등에서 일본어로 발표한 작품이나 일본어로 발행한 잡지 등도 ‘일본문학’의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센터가 구축한 아카이브(http://archive.kujc.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번 국제학술 심포지엄은 두 개의 선행 시도가 열매를 맺은 것이라는 평가다. 하나는 ‘동아시아와 동시대 일본어문학 포럼’의 결성(2012년)이고, 다른 하나는 ‘跨境(과경)-일본어문학연구Border Crossings:The Journal of Japanese- Language Literature Studies ’라는 국제학술지의 창간(2014년)이다.

포럼은 이번 국제 심포지엄의 공동주최자. 고려대와 중국의 베이징사범대, 대만의 푸런대, 일본의 나고야대, 규슈대, 에히메대의 연구자들이 주축이 돼 결성했다. 취지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공통성을 가진 연구자들이 일본근대문학 체험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상호 비교하면서 일국주의(一國)主義)의 연구풍토를 지양하고 각국의 열린 시각으로 일본문학을 연구하자는 것. 단안(單眼)이 아니라 복안(複眼)으로 일본문학을 보자는 의미로 읽힌다. 복안 속에는 당연히 일본이 갖고 있는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만이 아니라, 자국의 잘못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자계(自戒)도 포함돼 있다.

이 포럼은 또 다른 목적도 갖고 있다. 유재진 교수는 두 가지로 요약한다. 지속가능한 연구네트워크 조성과 차세대 신진학자의 육성이다. 포럼은 2013년 고려대, 2014년 중국 베이징사범대에 이어 올해는 대만 푸런대에서, 내년에는 일본 나고야대에서 순회포럼을 이어간다. 이벤트성 행사로는 연구의 성과를 거두거나 담아내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포럼에는 대학원생과 박사학위자도 패널로 참여시켜 학문후속세대를 공동으로 육성하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포럼의 목표를 구현한 것이 바로 ‘跨境(과경)-일본어문학연구’라는 국제학술지다. ‘跨境’이라는 단어는 낯설다. ‘跨’라는 글자는 양쪽에 걸터앉은 형상을 뜻한다. 그러니 ‘跨境’은 변두리를 뜻하는 변경(邊境), 단순히 경계를 마주하는 접경(接境), 국경을 넘어가는 월경(越境)과도 다르다. 창간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경-경계에 걸치다. 걸치는 것은 단순히 넘는 것과는 다르다. 분할선을 넘으면서, 동시에 그 양쪽에 발판을 둔다는 뉘앙스로 사용된다.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쳐서 잇는 것. 각각의 국지성이나 입장을 무시하는 일 없이, 그곳에 하나의 발판을 두면서 다양한 ‘경계(境)’ 너머로 다른 발을 내딛는 것.” 창간호가 특집테마로 ‘동아시아의 일본어잡지의 유통과 식민지문학’을 설정하고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학자의 관련논문 10편을 집중 게재한 것은 이 잡지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跨境’은 일본 학술지나 문예지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일본 밖에서 일본근대문학에 관한 논문을 모아 일본어로 발행하는 국제저널은 이 잡지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개막 축사에서 가나스기 겐지(金杉憲治)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가 “작은 놀람과 대단한 의미”라고 표현한 것은 이 잡지에 대한 헌사다. 이 잡지는 일본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전 세계 300여 곳의 기관과 대학, 연구자그룹에 배포됐다. 매년 6월 30일 한 차례 간행이 목표다.

이 잡지는 게재 논문을 선정하기 위해 ‘사독(査讀·심사)’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실릴 만한 논문을 받아 그냥 싣는 것이 아니라, 논문을 싣고 싶은 사람이 논문을 보내오면 각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편집위원과 사독위원들이 심사해서 싣는 것이다. 그만큼 질을 담보하고, 시대성과 시사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잡지는 SCOPUS 등재를 추진 중이다. SCOPUS는 네덜란드의 엘스비어사가 2004년에 만든 세계 우수 학술논문 인용지수. 만든 지 얼마 안 됐지만 1960년 미국 톰슨사가 만들어 널리 알려진 SCI인용지수에 버금갈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SCI가 영어논문만을 인정하고 있지만 SCOPUS는 비영어 논문도 폭넓게 인정하고 있어 일본문학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집위원장은 정병호 교수가 맡고 있고, 편집위원과 사독위원 중 상당수가 이번 국제 심포지엄에도 참석했다. 따라서 국제 심포지엄과 ‘동아시아와 동시대 일본어문학 포럼’, 국제학술지 ‘跨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3개의 굵은 가지라고 볼 수 있다.

고려대 일본연구센터가 다방면에 걸쳐 일본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병호 교수는 말한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교량적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한반도에 부여된 세계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고려대와 고려대 일본연구센터가 동아시아학의 허브로 성장하고 인정받길 희망한다.” 그러면서 그는 21세기 들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논의하는 단계까지 좋아졌던 역내 분위기가 10여 년 만에 급전직하로 냉각된 것을 아쉬워했다. 그나마 HK(인문한국), BK(두뇌한국) 등 정부차원의 굵직한 프로젝트 덕분에 일본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 데 대해서는 안도했다.

기자는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최근 심포지엄이나 토론회, 간담회 등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다. 한일관계가 최악의 ‘복합골절’상태여서 그런지 분위기는 무겁고, 전망은 어둡다. 이런 곳에서 자주 접하는 말이 ‘아시아 패러독스’다. 한중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 경제 부문에서는 상호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반해, 외교 안보 부문에서는 오히려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번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다. 한일 양국의 새 정권이 출범한지 2년 반이 다 되어 가고 정상회담조차 열지 못하고 있는데도 일본문학연구는 물리적 국경을 뛰어넘어 연구방법론면에서 훌쩍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 외풍이 닿지 않는 연구의 세계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한일관계가 빙하기를 맞은 요즘, 일본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열고 일본어로 국제학술지를 발간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둘을 연관시켜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가 정치에 오염되거나 사회분위기에 매몰되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한일 간의 반목이 길어지자 드디어 ‘투 트랙’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사를 비롯한 정치적인 이슈와 그 밖의 문제들-예를 들면 경제 협력이나 국제적 이슈, 스포츠·문화·관광, 지자체와 청소년 교류 등-은 분리해서 대응하자는 것이다. 문학이든 무엇이든 일본을 연구한다는 것, 그것은 ‘비정치적인 트랙’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보호받아야할 분야다.

심규선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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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한 각국의 연구자들과 외빈들. 사진=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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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원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소장이 국제 학술심포지엄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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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조직한 정병호 김효순 엄인경 유재진 고려대 교수(왼쪽부터). 사진=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이번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조직한 정병호 김효순 엄인경 유재진 고려대 교수(왼쪽부터). 사진=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과경(跨境) 창간호 표지. 일본 밖에서 일본근대문학에 관한 전문가들의 논문을 묶어 일본어로 발행한 첫 국제학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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