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윗부분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조선시대 왕비 복장으로 앉아 있다. 그 품에 앉아 있는 아기 예수는 왕자 예복인 사규삼(四揆衫)을 입고 빨마 가지(순교자의 승리를 상징하는 대추야자)를 들고 있다. 그 아래 좌우로 124위 복자들은 구름 속에 도열해 있다. 중앙 좌측에는 윤지충 바오로가 상복을 입고 서 있고, 건너편 쪽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사제 복장인 수단에 중백의, 붉은 영대를 걸치고 복음서를 들고 있다.
26일 서울 중구 중림로에 있는 천주교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소장 장긍선 신부)에서 만난 ‘한국순교복자 124위 복자화’의 모습이다. 이콘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그림을 가리킨다.
이 복자화는 장 신부와 최진호 이정희 씨의 작품으로 꼬박 7개월이 걸렸다. 판에 천을 덧붙이고 아교를 칠하는 판 작업에만 두 달이 걸렸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등지에서 공수해 온 천연 안료가 사용됐다.
“복자들이 순교할 당시의 상황과 양반과 중인, 궁녀 등 신분에 맞춰 갓과 도포, 저고리의 모양을 다르게 표현했다. 결혼하지 않거나 부부이면서도 동정(童貞)을 지킨 이들에게는 빨마 가지 대신 백합을 상징으로 했다.”(장 신부)
복자화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가 강하다. 순교의 고통을 겪었지만 천상의 영광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실제보다 밝고 아름답게 묘사됐다는 설명이다.
29일은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기념일이기도 하다.
“날짜를 맞춘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복자 기념일을 앞두고 그림이 완성돼 그 의미가 더 깊다. 가톨릭에서 복자와 성인들은 일반 사회의 위인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복자화를 보고 기도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 선배들의 삶을 충실히 따르기를 바란다.”(장 신부)
최진호 씨는 “자료가 많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쉽지 않았다”며 “복자들의 삶을 공부하고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정희 씨는 “이콘의 전통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우리 복식과 순교사에 맞춘 복자화를 완성해 기쁘다”며 “기교보다는 마음으로 작업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연구소는 2003년 문을 열었다. 1997년부터 5년간 러시아정교회 신학교 대학원 과정에서 이콘화를 공부한 장 신부의 귀국이 계기가 됐다. 1년에 한 번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현재까지 150여 명이 거쳐 갔다. 대형 프로젝트가 있으면 이번처럼 팀을 꾸려 이콘 제작에 나선다. 연구소는 최근 가톨릭대 신학대학 개교 160주년 기념 성화도 완성했다.
“이콘은 그리스도교 미술의 초기 형태인데 단순하면서도 깊은 영성을 담는 것이 특징이다. 불화(佛畵)의 진수를 맛보려면 경전과 교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이콘 역시 성서와 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공들여 이콘 작업에 매달리면 그림은 물론이고 신앙 공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장 신부)
연구소는 6월 2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길 갤러리1898에서 제8회 이콘연구소 회원전 ‘영혼의 빛을 따라서’를 연다. 복자화와 함께 회원 30여 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02-727-233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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