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민족종교 갱정유도(更定儒道)의 최고 지도자인 한양원 도정(道正·92)을 간담회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나라의 큰 행사나 종교 지도자 모임에서 항상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멋진 풍모를 자랑해 왔습니다. 갱정유도에는 유교를 갱신해 예(禮)를 되찾자는 취지로 지리산 청학동 등에서 옛 모습을 하고 사서삼경을 공부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날 간담회의 주제는 평화통일 선포 50주년을 기념한 학술 세미나였습니다. 6월 4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서는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이 ‘한반도 평화통일과 민족도의 정신’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합니다.
세미나가 끝난 뒤에는 갱정유도에 소속된 갓 쓴 도인 200∼300명이 거리로 나와 50년 전 벌였던 거리 행진을 재현하며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며 드리는 두 번째 호소문’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1965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갱정유도 도인 500여 명은 전북 남원에서 상경해 서울 시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평화통일 선언문이 담긴 유인물 30만 장을 시민들에게 배포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기이한 난동’ ‘갓 데모’ 등으로 묘사했네요.
갱정유도가 작성한 ‘통일과 평화를 위한 민족선언’에는 ‘원미소용(遠美蘇慂)하고 화남북민(和南北民)하자·미국과 소련의 종용(꼬임)을 멀리하고 남북민이 화합하자’ 등 4개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원미소용’은 민족을 분단시킨 미국과 소련의 종용을 멀리하자는 의미인데 당시 정권은 이를 ‘미국을 멀리하고 소련의 종용을 받자’로 해석했습니다.”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한 도정의 말입니다. 그는 “경찰이 반공법 위반으로 나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구속했지만 결국 92일 만에 무혐의로 석방됐다”고 하더군요.
간담회에서는 행사 주제와 한 도정의 풍모 때문인지 최근 건강과 도인술 등에 얽힌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는 2013년 택시에서 내리다 손가방이 문에 낀 채 달리는 차에 매달려 30m가량 끌려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엉덩이와 허벅지 쪽 뼈가 으스러져 중환자실로 실려 갔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14일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자 장례 준비까지 마쳤다네요.
하지만 한 도정은 건강을 회복해 다리를 조금 저는 것 말고는 큰 불편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타고난 건강에 과로(過勞) 과민(過敏) 과식(過食)을 피하고, 아침마다 도인체조를 하면서 어려움을 넘겼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성균관장과 초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비서를 했던 그는 가톨릭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불교의 효봉·경봉 스님, 개신교 강신명 한경직 목사 등과 활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총재(1920∼2012)에게는 주역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제 ‘백 세 장수하라’는 말 들으면 기쁘지도 않아. 몇 년 안 남았는데 뭐. 백이십은 가야지. 하하.” 호탕한 그의 말입니다. 10년 뒤에도 우리 종교계의 산증인인 그에게서 비화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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