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테너 카우프만이 전하는 19세기 말 ‘오페라의 황금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일 03시 00분


요나스 카우프만
요나스 카우프만
1880년대 초 이탈리아 오페라계는 위기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국가적 영웅이었던 주세페 베르디가 새 작품의 발표를 줄이고, 쥘 마스네가 대표한 프랑스 오페라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19세기 중반 90% 선이었던 오페라극장의 자국 작품 비율은 이 시기에 40%대로 떨어졌습니다.

특히 베르디의 소속사이던 ‘카사 리코르디’의 위기의식은 컸습니다. 베르디의 후계자가 될 새 오페라 영웅을 띄워 올려야 했습니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수제자로 육성받던 자코모 푸치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1884년 푸치니의 첫 오페라 ‘빌리’ 초연을 지켜본 이 회사의 줄리오 리코르디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푸치니는 그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오페라 흥행사의 대작을 써내려갑니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 수입을 주도한 곳은 카사 리코르디의 경쟁사인 손초뇨였습니다. ‘고국의 문화계를 육성하지 않는다’는 눈길이 따가운 것을 느낀 이 회사는 1883년부터 젊은 오페라 작곡가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단막 오페라 작곡경연’을 개최했습니다. 1889년 우승작인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대성공을 거뒀고, 마스카니는 이후 카사 리코르디를 견제할 손초뇨의 대항마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흥행 경쟁 속에서 희생된 인물도 있습니다. 푸치니의 고향인 루카의 4년 선배인 작곡가 알프레도 카탈라니입니다. 그는 소속사가 카사 리코르디에 합병되는 바람에 뒤늦게 리코르디 진영에 뛰어들었으나 리코르디는 푸치니를 흥행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카탈라니는 소외감 속에서 39세의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지만 ‘라 왈리’라는 걸작을 남겼습니다. 푸치니와도 카탈라니와도 두루 친했던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평생 카탈라니를 푸치니보다 뛰어났던 작곡가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19세기 말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내력을 소개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첫 내한공연에서 카우프만과 소프라노 홍혜경은 위에 소개한 베르디, 마스네, 푸치니, 마스카니, 카탈라니의 작품들을 노래합니다. 두 사람의 멋진 노래와 함께 뜨거웠던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느껴보는 자리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요나스 카우프만#테너 카우프만#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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