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날이라고 생각되는 특별한 하루가 있다. 어쩌면 그런 날을 위하여 나머지 그저 그런 날들을 사는 건지 모른다. 지난 수요일 오후,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지나간 그 한나절이 지금까지 싱그럽게 남아 있다. 그날의 뜬금없는 축복은 그러나 실상 시작점이 분명하다.
나는 시를 좋아하지만 기억력 좋은 남편은 시를 잘 외운다. 5년 전이었다.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이란 비교적 긴 시를 남편에게 ‘누가 빨리 외우나’ 시합하자고 했다. 벼락치기 공부에 숙달된 내가 더 빨리 외웠지만 오래 기억하는 쪽에서는 남편이 앞섰다. 그 이후 남편은 좋은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늘 이 시를 외우곤 했다.
그렇지만 막상 이 시를 쓴 시인을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마종기 시인은 미국에 사는 분이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부친인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의 전집과 자신의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을 출간하면서 이번에 고국을 방문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 부부가 자주 ‘우화의 강’을 암송하는 동안 남편의 ‘절친’인 소리꾼 장사익 선생은 마종기 시인의 시 ‘상처’로 노래를 만들었다. 그 인연으로 시인과 소리꾼이 처음 만나는 날, 양쪽의 친한 친구도 함께 자리했다.
시인은 ‘우화의 강’에서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라고 했다. 웬만큼 세상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 사람을 오래 좋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렇기 때문에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고,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그런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는 시인의 소망은 또한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된다.
한 편의 시가 맺어준 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마음이 깊은 법문을 들은 뒤처럼 맑고 향기로웠다. 왜냐면 시인이 그의 오랜 친구인 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과 교감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며 ‘우화의 강’에서 받은 감동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기까지 과정을 보면 중간에 어느 사소한 것 하나가 틀어져도 인연으로 맺어지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며 아름다운 인연이야말로 큰 축복이다. 다시금 ‘우화의 강’을 떠올려보면서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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