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오의 우리 신화이야기]액과 살을 막아주는 신, 군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6일 03시 00분


군웅 무신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30년대.
군웅 무신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30년대.
사신(使臣)으로서 국가의 중요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사람,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 피 흘리고 죽은 사람, 생전에 장군이나 무인(武人)으로서 병서와 무예에 능통했던 사람 등등. 민간신앙에서는 이들을 하나의 신적 존재로 뭉뚱그려서 한 개의 이름으로 통칭하기도 하는데, ‘군웅’ 또는 ‘구릉’이 그것이다. ‘군웅본풀이’는 바로 그 군웅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구전신화이다.

군웅의 할아버지는 천황제석, 할머니는 지황제석, 아버지는 왕장군, 어머니는 희숙의랑. 신화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혈통만 신성할 뿐, 군웅의 아버지 왕장군은 나무를 베어 팔며 홀아비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한 초립동이 왕장군에게 와서 말했다. “나는 동해 용왕의 아들입니다. 동해 용왕과 서해 용왕이 싸움을 하는데, 우리가 항상 싸움에서 지니 장군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왕장군의 자신만만하고도 주저 없는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지만, 단지 바닷물이 무서울 뿐이다. 어떻게 하면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저하고 같이 가면 됩니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 왕장군을 업고 물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리며 없던 길이 났다. 용왕국으로 가는 신비의 바닷길이 생긴 것이다. 드디어 용왕국 도착. 왕장군을 보자 동해 용왕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내일 나는 서해 용왕과 싸움을 할 것이오. 그때에 내가 지는 것처럼 해서 물속으로 들어가면 서해 용왕이 물 위에서 이긴 것을 뽐낼 것이니 그때 활을 쏴 서해 용왕을 죽여주시오.” 과연 동해 용왕의 말처럼, 다음 날 동해 용왕과 서해 용왕 간에 대접전이 일어났다. 동해 용왕이 약속대로 지는 것처럼 하고서는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서해 용왕이 물 위에서 이긴 것을 뽐냈다. 이때 왕장군이 활을 쏘아 서해 용왕을 죽였다.

동해 용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리고 싶소. 어떤 상을 원하시오?” 용왕의 아들이 왕장군에게 와서 가만히 말했다. “다 싫다 하시고 연갑(硯匣)을 달라고 하십시오. 연갑 속에는 제 누이가 있는데, 그것만 얻으면 모든 일이 편할 것입니다.” 왕장군은 연갑을 달라고 동해 용왕께 청하였다. 동해 용왕은 난처하였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연갑을 왕장군에게 내주는 수밖에. 왕장군은 연갑을 가지고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면 연갑 속에서 선녀 같은 미인이 나와서 같이 잠을 자고 의복과 음식을 원하는 대로 가져다주었다.

동해 용왕의 딸은 왕장군과 산 지 삼 년째가 되니 세 아들을 낳았다. 왕근, 왕빈, 왕사랑이 그들이었다. “당신네는 이제부터 계속 부자로 잘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아니라서 이제 용궁으로 돌아갈 것이니, 당신들은 군웅을 차지하고 사십시오.” 이렇게 해서 왕장군의 아들들은 군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 용왕 간의 싸움에 인간이 끼어들어 생사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인간과 용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삶의 영역에 침투한 액(厄·모질고 사나운 운수)과 살(煞·흉악한 기운)을 물리쳐 주는 신, 즉 ‘군웅’으로 좌정하게 되었다는 결말이다. 서해 용왕의 위협으로부터 동해 용왕의 삶의 영역이 지켜졌듯이 집안, 마을 등 인간의 일정한 삶의 영역이 안전하게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이 ‘군웅’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군웅, 우리네 삶의 영역의 수호신인 셈이다.

최원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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