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의 금호미술관 기획전은 대개 후한 평판을 듣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전시 공간이 가진 효율성이 기획의 아쉬움을 상쇄한다. 희미한 졸가리로 작품들을 얼기설기 묶어 놓은 전시일지언정 ‘에이, 시간 버렸다’는 느낌은 피하게 만든다.
8월 23일까지 여는 작가 9팀의 기획전 ‘옅은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 역시 마찬가지다. “흑백 톤 무채색을 주제로 삼았다”는 두루뭉술한 설명은 전시의 전반적인 무색무취함을 반영한 듯하다. 작품 밀도는 층별 편차가 심하다. 무너지는 밸런스를 공간이 살렸다. 뙤약볕 가득한 삼청로를 걷다 지쳤다면 기대를 내려놓고 잠시 들러 보길 권한다. 전체를 꼼꼼히 뜯어볼 만한 전시는 아니다. 하지만 몇몇 방, 빙수보다 시원하다.
건물 앞에 서면 문 열고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회색 필름을 통유리 창에 붙여 놓아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얼핏 ‘공사 중인가’ 싶다. 태양광을 반사하는 반투명 필름을 붙여 만든 이 유리창은 김수영 작가의 설치 작품 ‘인벤션 No.4’다. 여러 건물의 입면 모습을 담아낸 회화를 그려 온 김 작가는 건물 외벽의 벽돌 패턴 이미지를 유리창 안쪽과 내벽으로 확장시켰다. 출입구가 전시 작품 중 하나임을 바로 눈치 채긴 쉽지 않다. 설명을 듣고 다시 보면 그렇구나 하게 된다.
맞은편 1층 전시실 바닥은 택배 상자에 충격 흡수를 위해 넣는 비닐 튜브로 빽빽이 채웠다. 벽 하나를 통째로 감싼 반투명 비닐 뒤에 백색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설치해 제목 ‘낙하’ 그대로 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공간을 내놓았다. 박기원 작가는 주어진 전시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상정하고 그곳을 찾는 관객을 재료로 흡수하는 공간설치 작업을 19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해 왔다. 신발 벗고 올라가도 괜찮다. 남들 시선만 괜찮다면 눈이 시원한 공간에 퍼질러 누워 한가로이 노닥거리는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백미는 지하 1층에 있다. 홍범 작가의 으스스한 애니메이션 옆으로 커튼이 굳게 닫혀 걸린 출입문이 있다. 젖혀 보니 암흑이다. 망설이다 몇 발 디뎌 들어가니 천장에서 드리운 가는 끈에 뭔가 잔뜩 매달려 있다. 98개의 소형 스피커를 사용한 김상진 작가의 사운드 조각 ‘고지로 간다’.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한 스피커가 희미한 빛과 함께 제각각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무작위로 선정한 지원자 수십 명에게서 받은 무반주 애국가 녹음이다. 170cm 신장이라면 바로 귀 높이에 스피커가 매달려 있다. 그 사이를 걸으며 노래를 들어보자. 이른 더위에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저릿한 한기가 느껴진다. 제창인 듯 돌림노래처럼 들리는 애국가 읊조림이 2분 30초간 이어지다 촛불처럼 흔들리며 사그라진다. 어느 지점에서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뒷덜미 위에 올라타고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시실을 빠져나와 큐레이터에게 음향 재생이 관람객 움직임에 따라 바뀌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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