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글로벌 북 카페]무솔리니의 처형이 조작됐다고?… 과잉된 미디어 병적 음모론 경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1일 03시 00분


움베르토 에코 신작 ‘누메로 체로’

“루저(loser)는 늘 승자보다 많은 지식을 추구한다. 만일 이기고 싶다면 하나만 알아야지 모든 것을 알기 위해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의 기쁨은 루저를 위한 것이다.”

이탈리아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83)의 일곱 번째 소설이 최근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로 유명한 에코 특유의 역사적 사건의 복잡한 음모론과 창의적인 해석, 신랄한 풍자가 번뜩이는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은 ‘누메로 체로(Numero Zero)’(사진). 신문의 창간호를 ‘넘버 1’이라고 한다면, 창간을 준비하면서 내는 시험판이라는 뜻이다. 에코는 이탈리아의 거대한 미디어 재벌과 부패한 정치, 경제권력 간의 암투를 스릴러와 풍자소극을 적절하게 뒤섞어 그려낸다.

소설의 배경은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 밀라노. 호텔부터 프로축구단, TV 채널, 타블로이드 신문까지 소유하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미디어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염두에 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 남자는 6명의 기자를 고용해 ‘도마니’(Domani·내일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신문 창간을 1년 동안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창간에 앞서 명망 있는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스캔들이 담긴 ‘시험판’(Numero Zero) 수십 개를 만들어 내라는 요구가 더해진다. 그러나 이곳이 가짜 편집국이며 신문이 절대로 창간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편집장과 주인공인 대필작가 콜로나만 알고 있다. 돈을 대고 있는 미디어 거물은 이 신문을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거래를 위한 ‘협박용’으로만 활용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엉뚱하게 흘러간다. 기자들이 시험판을 준비하다가 거대한 역사의 음모론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간다. 그 음모론은 1945년 처형당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죽음이 조작된 것이며 진짜 무솔리니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해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음모론은 냉전시대의 강대국 간의 경쟁,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 정치인, 성직자, 테러리스트, 마피아, 프리메이슨, 교황까지 종횡무진 얽혀든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고, 진부하고 상투적인 용어가 난무하는 편집회의에 대한 세밀한 묘사도 잊지 않는다. 그는 소설에서 “음모론은 과잉된 미디어가 상식을 전복시키는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병”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지난달 파리에서 열린 북 사인회에서 왜 이렇게 ‘종말론적인 미디어관’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에코는 “문학의 역할은 항상 되돌아보고, 생각하는 염세적인 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움베르토 에코#누메로 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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