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24>등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2일 03시 00분


등대 ―김선굉(1952∼ )

저 등대를 세운 사람의 등대는 누가 세웠을까.
물의 사람들은 다 배화교의 신자들.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생의 노를 저어
부서진 배를 바닷가에 댄다.
등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배를 비끄러매고,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으로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른 길을 걷는다.
내 생의 등대가 저 깜빡이는 불빛 아니던가.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
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들.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이고 등불을 끈다.


화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어둠 속에서 풍랑을 헤치는 듯 막막하고 고독한 가장이다. 늦은 밤, 생의 짜디짠 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질벅질벅 무겁다. 그 길이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르’단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지형도 가파르기 십상이고, 그 골목은 그들의 발자국으로 어둡고 축축할 테다. 즐거운 곳에서는 아무데서도 오라는 데 없고, 유일하게 나를 위한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 내 작은 집을 찾아드는데 왜 이렇게 와락 피로가 몰려오고 비애가 밀려드는 걸까. 거기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들’이 있으니까.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겠지. 엄마도 아빠도 아이들도, 온 가족이 행복할 거야. 난파한 ‘물의 가족’은 행복하지 않다. 시시한 아버지와 어머니, 시원찮은 아이들이라고 이 시대는 재단한다. 늙고 무능한 부모와 별 볼 일 없는 미혼의 다 큰 자식들이 서로를 짐스러워하며 사는 가족도 있으리라. 제 몸을 살라 다른 이의 빛이 되는 일은 가족 간에도 드물다. 자식들은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날까 궁리할 테지만, 부모는 벗어날 길이 없다. 가난의 냄새, 불화의 냄새, 파탄의 냄새! 오, 하느님, 우리 가족이 끝내 그렇게 되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이는 가장들의 등대는 누가 돼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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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등대#김선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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