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확고한 선입견을 끌어안고 찾아갔다. 서울 종로구 키미아트는 코앞에 도열한 대형 갤러리와 비교하면 문자 그대로 손바닥만 하다. 14년 전 2층 주택을 갤러리로 개조한 공간이다. 1층이 전시실이고 2층은 카페를 겸한다. 콕 집어 특출하다고 언급할 건더기는 없다. 왁자한 선행들이 차지하지 않았다면 테라스 야외 자리가 조망도 바람도 시원하다.
30일까지 현홍 작가의 개인전 ‘모던 타임스 4-징글 징글(Jingle Jingle)’이 열린다. 오밀조밀한 주거 공간 뼈대를 그대로 남겨놓았기 때문인지 큼지막한 작품을 여유롭게 걸어놓을 만한 자리가 부족하다. 몇몇 작품은 겨우겨우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옹색하게 끼워 올려진 듯 보인다. 민망해진 시선이 프레임 밖을 겉돈다.
메뉴판을 받아들고 한참 고민하다가 허기를 누르고 차가운 커피 한 잔만 주문했다. 오르막을 걸어 오르느라 소비한 에너지를 보강하기에는 가격이 지나치다. 잔이 그리 큼직한 것도 아니건만 아이스 라테 한 잔이 8000원이다. 세 모금에 후루룩 비우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혼자 앉아 머물 만한 곳은 아니다.
선입견을 허문 것은 카페인 적신 눈으로 다시 찬찬히 뜯어본 작품이다. 찰랑거리는 라테, 진회색 콘돔, 흰 두건을 뒤집어쓴 누군가의 뒤통수, 유선 마우스, 뚜껑 벗긴 립스틱, 가득 채워 꽁꽁 묶은 검정 쓰레기봉투, 담배꽁초, 거품이 좌르륵 넘쳐 오르기 시작한 콜라 병, 텅 빈 종이 쇼핑 백, 동그란 알약 모양의 알록달록 초콜릿.
글로 설명해 나열하고 보니 어이없을 정도로 맥락 없는 사물들이다. 프레임 하나에 사물도 하나. 그 하나씩이 손오공 분신처럼 수십, 수백 개로 흩어져 있다. 가로 180cm, 세로 120cm의 인화지 위에 초콜릿 수백 알을 도미노처럼 쌓아 올렸다. 놀라운 건 샘플 복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족히 500개는 넘을 초콜릿을 하나하나 따로 촬영한 뒤 포토샵 프로그램을 써서 하나하나 핀셋으로 모자이크하듯 붙여 묶었다.
거품이 넘치는 콜라 병을 앞에 놓고 ‘야하다’고 하면 곧바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다. 그런데 30여 개를 모아 묶어 놓으니, 야하다. 작가는 무성(無性)의 사물이 군집해 이뤄내는 기묘한 에로티시즘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흰색 마우스는 영락없이 난자로의 경영(競泳)을 벌이는 정자 떼다. 늘어선 콘돔 떼는 오히려 직설적이라 무덤덤하다.
볕이 한참 남은 한낮의 평창동. 멀끔한 오르막길 모퉁이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의뭉스러움과 차지게 어우러지는 퇴폐미다. 갈증 난다. 02-394-6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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