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명준 씨(28)는 주말이면 서울 용산구 이태원으로 향했다. 독일 맥주 ‘바이엔슈테판 크리스탈바이스 비어’를 맛보기 위해서다. 수정같이 맑으면서도 눈처럼 거품이 소복이 쌓이는 이 수입 맥주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길 밖에 없었다. 김 씨는 “이태원에 그나마 구색은 갖췄으면서(각 나라의 여러 맥주가 있는 곳) 가격이 저렴한 곳이 좀 있다”며 “중이 절 찾듯 다녔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술을 사려거든 이태원으로 가야 했다. 맛있는 외국산 맥주를 찾는 게 한정판 와인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진 분명 그랬다. 미군들이 많이 거니는 해밀턴호텔 뒷골목이나 남대문 주류수입 상가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다 작고 허름한, 철문이 달린 슈퍼마켓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면 누런색 수입 병맥주 수십 병이 진열돼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름의 황금빛 맥주들이 ‘맥덕(맥주 덕후의 줄임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때 그시절 그들은 우쭐대며 말했다. “맥주 맛도 모르는 게….”
이제는 슬금슬금 식탁에 오르내려
하지만 최근에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희귀·고급 맥주’를 만날 수 있게 됐다. 일반 가정에서 맥주를 가볍게 즐기는 트렌드가 자리를 잡으면서 다양한 맥주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었는데 2∼3년 전부터 대형마트와 일반 술집들이 이에 맞춰 수입 맥주를 들여온 것이다. 그렇게 외국산 희귀 병맥주들은 슬금슬금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 씨 역시 최근에는 대형마트에서 바이엔슈테판 크리스탈바이스 비어를 사먹고 있다. 지금 마트에 가면 ‘씨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 ‘도그피쉬 헤드 90미닛츠 IPA’ ‘파이어스톤 더블 배럴 에일’ 등 읽기도 기억하기도 어려운 크래프트 병맥주들이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크래프트 맥주는 대기업이 아닌 개인이나 작은 업체들이 소규모 양조장에서 자체 개발한 제조법으로 특색 있게 만든 수제 맥주를 말한다.
사실 크래프트 맥주는 생산량은 적은데 사려는 곳이 많아 물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국내 대형마트들 역시 원하는 물량을 들여오기 위해 1년에 3, 4차례 미국 등을 오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진건 이마트 주류 바이어는 “가뜩이나 물량이 적은데 미국 내에서도 인기가 오르고 있고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도 수입을 원하는 곳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고 이야기했다. 물량을 구해도 문제다. 상품을 선적해 들여오는 물류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배로 한두 달 걸려 들여오는 과정에서 섬세한 향기 등이 변질될 우려가 있어 다른 제품에 비해 1.5배에서 2배에 달하는 물류 비용이 들어간다. 고급 와인을 싣는 ‘저온 냉장 컨테이터’로 모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의 가격은 8000∼1만 원대로 일반 수입 맥주보다 2배 이상으로 비싸다. 하지만 출시 후 두 달 동안 1만3000여 병이 판매(이마트 기준)될 만큼 꾸준한 인기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10여 종이 국내에 처음 얼굴을 비쳤는데 현재는 40여 가지로 종류도 다양해진 상태다.
파이 커진 수입 맥주 시장
실제 판매도 늘고 있다. 지난해 이마트의 주류 매출을 살펴보면 수입 맥주는 전년 동기 대비 10.7% 매출이 올랐다. 이는 와인(9.7%)을 뛰어넘은 수치다. 올해(5월 18일까지) 들어서도 이 같은 수입 맥주 상승세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동기 대비 매출이 25% 상승한 것이다. 이중에 상당수를 크래프트 맥주가 차지하고 있다. 반응이 뜨겁자 이마트는 주류 매장 내에 별도의 크래프트 맥주 존을 만들기까지 했다.
국내 수입 크래프트 맥주 시장의 규모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2012년 7억 원이던 것이 2013년 25억 원으로 늘어났다. 2018년에는 1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4월 개정된 주세법도 이러한 확장 추세에 기름을 부었다. 맥주 제조장 시설 기준이 연 생산량 150kL에서 75kL로 완화되고 중소 맥주제조사 지원도 확대된 것이다. 국내에서 중소 규모의 양조사들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주류 업계에서는 작은 양조장들이 지방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