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로 여행을 떠난 한 가족이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매력적인 곳으로의 여행이지만 그 여정이 너무나 신산스럽다. 곳곳에 도사린 난관들을 꾹꾹 참아가며 한 발짝씩 옮겨가는 경주 여행은 개인들이 어떻게 시대를 참아내고 삼키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은유하고 있었다.
이토록 버겁게 다가온 ‘그’와 가족의 여행을 따라가며
‘그’와 그의 가족 여행은 ‘부여된 상황’에 소소한 즐거움 하나를 더하려는 우연한 생각에서 시작됐고, 계획한 목적지는 더구나 경주가 아니었다. 그의 선친을 모신 묘가 개발 계획에 포함되면서 이장을 해야했고, 그에 따른 약간의 토지 보상금을 받기 위해 그가 대구로 가야했던 것이 여행의 빌미였다. 이왕 가는 거 16만원의 보상금(지금의 가치로 따져보면 대략 40만원쯤 되지 않을까?)으로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녀와도 좋겠다는 생각에 2박 3일 일정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런데 보상금 수령부터가 만만치 않다. 늦봄 대구의 뜨거운 볕을 뚫고 찾아간 ‘동사무소’는 보증인 문제로 그의 보상금 처리 건을 구청으로 넘긴다.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다 겨우 도착한 구청. 그러나 보상금을 타기 위해서는 다시 구청에서 한참 떨어진 은행까지 가야 했다. 택시는 아예 기대도 못해 무거운 가방을 힘겹게 둘러멘 그와 딸아이를 업은 아내는 역시나 뙤약볕 아래를 한참이나 걸어 기어이 보상금을 수령한다. 독자들은 민원 하나를 처리하는 데도 여기 가서 뭐 발급받아라, 다시 이것 준비해 와라, 저기 가면 무슨 확인을 해줄 것이다 식으로 우리네를 이리저리 ‘돌려댔던’ 관청에서의 오래지 않은 기억을 이 가족들을 통해 생생히 되새김질할지 모른다.
녹초가 된 가족은 이제 진짜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아침부터 이어진 보상금 처리에 진을 뺀 그들은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들른 허름한 식당의 주인에게 추천받은 한 온천장과 경주로의 여행을 결정한다. 그러나 아내가 딸아이에게 ‘이번 여행은 할아버지의 선물’이라며 애써 동화적인 수사로 포장한, 묘지 이장에 대한 보상금을 받아든 ‘그’의 속내는 여러 가지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선친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스물여섯살 되던 해에 아내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솜씨 좋고 부지런한 선친은 그곳 농장에서 일하며 돈을 제법 모아 고향에 조금씩 땅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인공 치하’가 되었고, 곧이어 ‘지주와 일제, 국가가 소유한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하고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다’는 것을 기조로 한 토지 개혁이 실시됐다. 선친은 지주도, 대단한 부농도 아니었으나 일본인 밑에서 번 돈으로 재산을 축적 했다는 게 화근이 돼 무상 몰수 대상자로 분류된다. 선친이 택한 길은 땅을 내버려두고 남으로 내려오는 것뿐이었다.
6 25 전쟁이 일어나고 대대적인 북진을 틈타 홀로 (아마 땅을 되찾으려는 마음에) 고향으로 올라갔던 선친은 폭격에 장애를 입고 아무런 소득 없이 내려온다. 그의 삶은 여기까지였다. 기력을 잃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어떤 생업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모습이 그 당시 갓 태어난 ‘그’가 이후 내내 맞닥뜨렸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억척스레 자식들을 키우려 아등바등했던 어머니와 달리 그는 막걸리 잔이나 기울이다가 부질없는 고향 얘기며 땅 얘기만 간간이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사실 여행을 나서기 전, 여성 잡지사 수석 기자였던 그는 사표를 던진 터였다. 아내에게는 말할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한 채 그간 밥벌이에 매달렸던 일상을 벗어나고자 제안한 가족 여행이었다. 그의 사표에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이유가 있었다.
7년 전, 그러니까 1980년 6월 잡지사로 찾아온 검은 승용차의 사내들에 의해 경찰서에 끌려간 그는 영문도 모르는 채 모진 고문에 시달린다. 1980년의 그 시절에 그는 투쟁을 외치던 이도, 그와 관련된 어떤 활동에 조금이라도 몸담은 이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말해 줄 것이 없어 꼬박 하루 동안 고문을 당한 끝에, 고문자들에게서 근황 정도나 간간이 알고 지내던 대학 동창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다. 그땐 그랬다. 며칠의 고문이면 당신이 그저 이름만 알고 있는 누군가와 반체제 조직의 리더가 될 수도 있고, 공작금을 주고받으며 암약한 불순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날의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두통은 경주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불쑥불쑥 그에게 찾아온다. 작열하는 햇살과, 선친에 대한 기억과, 고문에 대한 악몽으로 점철된 여행. 그리 길지 않은 중편 소설임에도 숨이 차오르는 중압감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작품이 ‘천마총 가는 길’이다.
현실을 짓누르는 폭력의 현실을 떠나오며
‘천마총 가는 길’은 양귀자가 198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작품이다. 양귀자는 시대와 인간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묘사로 많은 독자를 사로잡아온 베스트셀러 작가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쉬웠다. 지나치게 은유적이지도 않고, 하나의 대상에 심하게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처한 현실을 짚어내는 주제를 발굴하는 데 탁월하다. 한국의 현대사,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라는 시대가 주는 무게감도 피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의 이야기와 저 너머의 희망을 치밀한 이야기 구조로 그려내 깊은 몰입도를 맛보게 했다.
‘천마총 가는 길’의 주인공인 ‘그’가 처한 현실과 경주 여행의 발단이 된 선친의 기억을 놓고 보면 한 개인과 개인이 우리 현대사의 주요한 순간순간에 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의 분단, 전쟁, 그리고 독재 권력의 구성원들이 개인의 생사가 오가는 고문의 순간에 몸이 약한 아들의 걱정을 늘어놓는 끔찍한 시간들. 무엇보다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 갔던 고문자들을 우연히 갈비집에서, 그것도 나란히 놓인 테이블에서 둘 모두 가족 동반 외식을 하는 상황으로 만나 어색하면서도 맘 편한 사이인 듯 인사를 나누는 경악스러운 경험도 잔인한 시대가 인간을 얼마나 어이 없고 굴욕적이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상징한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영화 ‘박하사탕’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이 둘의 연관성을 뚜렷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 시절, 흔치 않게 벌어졌던 일이었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겪은 뒤에 떠난 경주 여행은 소설 전반에서 지치고 버겁게 그려진다. 주인공 스스로 왜 조금 더 활발하지 못한지를 탓하지만 이미 독자들은 들떠 여행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돼버렸다. 시간적 배경이 1980년대 중반이다 보니 지금의 여행과 사뭇 다른 분위기라는 점도 독자의 버거움을 더한다. 자가용이 흔하지 않아 버스와 택시 등 대중교통에 의지해야 하는 동선도 불편하기 그지없고, 숙소도 마땅찮아 보인다.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결정된 여행지여서 새로운 상황들이 신선할 수도 있건만, 주인공은 매 순간 울분을 삼키고 아내와 딸아이는 애써 즐기려는 노력이 선연하다. 경주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여행지가 그야말로 우울감으로 가득 찬, 매력 떨어지는 도시로까지 비친다.
이렇듯 현실을 즐기지 못하고 짓눌러버리는 또 다른 현실에 대한 거침없는 노출이 작가 양귀자의 소설이 주는 매력이다. 만약 주인공의 주변은 행복하고 즐거운 일로 가득한데 내면은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부조리를 보여주었다면 소설은 어느 지점부터 난해해졌을 것이고, 독자들은 그 숨은 의미와 주인공의 심정을 두 번 세 번 헤아려보느라 분주했을 터지만, 현실의 매 순간이 주인공을 짓누르는 이 무게감은 역시나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나라면 벌써 폭발하고 말았을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게다가 경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제야 드러나는 주인공의 고문에 대한 악몽은 그 묘사가 소름 끼치도록 자세하고, 심리의 변화와 부침은 직설적이고도 예리하다.
옛 신라의 왕릉 한가운데서 시작하는 경주 여행
경주는 발길 닿는 곳마다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적들로 가득하다. 경주를 여행하다 보면 농토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발을 앞둔 땅도 아닌데 그냥 버려지듯 황량한 들판을 종종 보게 된다. 땅을 팠다 하면 유물이 나와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지경이 빚어낸 독특한 풍광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주 여행을 계획하기가 막막하다는 이들이 많다. 갈곳도 볼 것도 많은 듯한데, 어디를 어떻게 가야 제대로 경주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꼭 한번은 들르다 보니 더없이 익숙한 듯해 찾기도 망설여진다. 경주 여행을 계획할 때 크게 세 구역 정도로 나누면 좋을 듯하다. 옛 수도의 중심지 일대인 시내 역사유적 지구, 보문단지와 불국사 그리고 남산 등을 아우르는 부심 지역, 바다가 어우러진 또 다른 정취를 맛보는 동해안권 등이다. 일정도 2박 3일 정도는 잡아야 안심할 수 있다. 경주를 여행해본 사람일수록 갈 곳 많고 넓은 고장이라는 사실에 더 막막해진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숱한 ‘보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두 배나 된다는 현실적인 공간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선 경주 시내 역사유적 지구에서 대릉원과 계림, 황룡사지와 그 일대, 동궁과 월지 등을 꼭 챙겨야 한다. 특히 대릉원에는 5, 6세기를 중심으로 조성된 경주 전역의 1백50여 기의 거대한 봉분들 가운데 20여 기가 모여 있다. 왕 혹은 최소한 왕의 직계 가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이 웅장한 물결을 이루듯 조성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평지에 관을 놓고 그 위를 덧씌운 뒤 큼직한 돌과 흙을 쌓아 도굴을 막았던 신라 특유의 무덤 조성 양식 덕분에 숱한 부장품들이 이 고분들에서 출토됐다. 그러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진 건 미추왕릉 하나에 불과하다. 대신 발견된 지역, 주요한 부장품의 이름을 따 ‘황남대총’ ‘천마총’ 등으로 불린다. 대릉원 최고의 명소는 오늘 소개한 소설의 마지막 여정에 등장하는 천마총이다.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은 화려한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눈부신 부장품과 더불어 자작나무 말안장 덮개에 그려진 흰 천마 그림 덕분이다. 무덤의 절반을 잘라 박물관처럼 활용하고 있어 옛 신라인의 삶과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특이한 경험이 이곳에서 가능하며, 이 순간의 정황은 소설에서도 꽤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대릉원을 비롯해 주변을 두고 보통 대릉원 지구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아시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가 있다. 특이하게 쌓아 올린 건축 기법과 우물 정자로 끼워놓은 장대석 덕분에 신라에서 일어났던 큰 지진에도 끄떡없었다고 전해진다. 밤이면 주변에 조명을 밝혀 은은한 경관과 운치가 제법이다.
경주에서 꼭 밤에 봐야 할 유적이 몇 곳 있는데, 그 가운데 ‘동궁과 월지’를 빼놓을 수 없다. 오랜 시간 ‘안압지’라고 불렸던 이곳은 신라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월성(반월성)의 동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왕이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맞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동궁과 월지는 해질 녘부터 폐장(밤 10시)까지 늘 많은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조명을 받아 잔잔한 수면에 비친 누각과 연못 주변의 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물론이고, 전체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특한 건축 기법이 신비감을 더한다. 중앙의 누각에서는 연못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있는데, 섬세한 문양의 기와와 장신구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재미난 벌칙을 써놓고 놀이를 즐기는 일종의 신라식 주사위인 ‘주령구’도 이곳에서 출토됐다.
불국사, 그리고 동해로 이어진 신라의 길
경주 여행에서 정말 마음먹고 가야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바로 남산 일대다. 해발 468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산자락 여기저기, 그리고 주변에는 알려진 것만 1백여 곳의 절터와 80여채의 석불, 그리고 60여 기의 석탑 등이 펼쳐져 있다. 남산을 등반하며 이 역사 유물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남산의 40여 골짜기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불교 유적이 있는 삼릉골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인기 있는데, 비교적 가파른 산행 동안 마애관음보살입상, 석조여래좌상, 선각육존불, 선각여래좌상, 선각마애불 등이 다양한 조성 방식으로 신묘함을 전해 힘든 산행을 달래줄 것이다. 남산 자락을 둘러가며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담긴 우물인 나정과 통일신라를 마감한 현장인 포석정 등 익숙한 곳들이 많으므로 충분한 시간을 두고 둘러보기를 권한다.
이제 보문단지를 거쳐 경주 여행의 상징과 같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두루 둘러보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 이곳들을 찾았다면 그사이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풍광들을 마주하며 기억을 맞춰보는 시간을 즐겨도 좋겠다. 보수 공사가 한창인 석가탑을 제외하고는 다보탑의 섬세미와 아직껏 축조의 신비와 의미를 다 풀지 못한 불국사의 이모저모, 그리고 볼 때마다 한결같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석굴암이 정말 경주 땅을 밟고 있음을 실감하게 할 것이다. 불국사 지구에서 동쪽으로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가면 곧장 바다에 이른다. 경주가 자랑하는 수려한 해안은 걷기 길로도 조성돼 많은 도보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다. 의외로 소박한 규모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그 의미를 앞세우는 것이 좋을 듯한 문무대왕 수중릉이 해안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여기에 경주 일대가 옛 화산 지대였음을 증명하는 독특한 지형인 양남면 해안의 주상절리도 챙겨 보길. 지금까지의 문화 유적과 달리 이색적인 자연경관이 색다른 감흥을 주는데, 해안과 맑고 푸른 동해의 파도 사이에 육각형의 기둥을 닮은 바위들이 부채를 펼쳐놓은 듯 누워 있거나 비슷한 형태로 굳은 화산암들이 곳곳에서 바위군을 형성하는 진귀한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이 해안을 따라 포항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경주 최대의 어항이자 풍성한 해산물이 부려지는 항구인 감포에서 바다의 맛을 가득 느끼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다.
Epilogue
‘그’와 그의 가족들의 여정은 천마총을 둘러본 뒤 대릉원을 빠져나올 즈음 발견한 ‘천마총 가는 길’ 표지판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행 내내 (과거 고문의 후유증인 듯한)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던 그는 천마총에서 발굴된 목관을 감싼 관람용 유리벽에 머리를 기대며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엉겨 붙어, 끝까지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속으로 외친다. 그리고 표지판 앞에서 미소 짓는 아이의 모습을 최대한 정성껏 사진으로 담아내려 애쓴다. 천마총 가는 길을 알리는 이 표지판이 ‘그’를 어디로 가라고 일러주는 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고문 이후 7년간의 굴욕의 기억을 견디지 못해 사표를 던지고 떠난 경주 여행에서 그 자신의 지난 삶과, 선친에 대한 어두운 기억과, 고통스러운 1980년 6월과 이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천마총은 그에게 다시 살아 보고 싶다는 외침을 낳게 한 공간이 된 셈이다.
Travel Information
1. 경주 여행 일반 정보 경주 문화관광 (054-779-8585 guide.gyeongju.go.kr)
2. 교통편(서울 출발 기준)
· 기차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할 경우 동대구에서 환승해 경주역으로 가는 것이 좋다. KTX는 신경주역에 정차하는데, 서울에서 2시간 만에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내에서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KTX 신경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 대릉원과 첨성대로 가려면 60번이나 61번 버스를, 보문단지와 불국사로 가려면 700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시내버스 이용 문의 www.gumabus.com
· 승용차 경부고속도로 경주IC까지 약 4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대구를 지나면 공사 구간이 많으므로 운전에 주의해야 한다.
·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서울~경주 간 고속버스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이용하며, 심야 고속버스를 포함해 하루 약 17회 운행한다.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출발하는데, 심야버스 편을 포함해 하루 약 20회 운행한다. 소요 시간은 4~4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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