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20m에 이르는 장대한 두루마리에 1711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담은 그림. 영화는 두루마리에 그려진 조선인과 일본인 4800명의 얼굴을 세밀하게 포착했다. 이 그림에서 1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고품격 문화교류에 대한 현지인들의 기대감이 넘실거릴 뿐이다.
3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선린외교의 재조명’ 기념강연회에서 고 신기수 선생의 기록영화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가 상영됐다. 한일의원연맹과 동서대 일본연구센터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양국 선린외교의 아이콘으로 조선통신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환영사에서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데모에 나서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제가 이제 한일의원연맹을 이끌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며 “올해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 간의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를 풀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는 축사에서 “조선통신사는 상호 신뢰와 진심을 바탕으로 교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오늘날 양국 관계를 정립하는 데 선조들의 선린외교 정신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영화 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풀어냈다. 정 교수에 따르면 통신사 호칭이 처음 쓰인 것은 1375년 고려시대였다. 당시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과 겹쳐 왜구가 극성을 부렸는데 고려 조정이 이들에 대한 통제를 요구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에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분기점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조선통신사와 더불어 일본 측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단인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가 교차로 양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국왕사의 한반도 입국을 불허했다.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한양까지 도달한 통로가 임진왜란 당시 침략 루트로 고스란히 활용됐기 때문이다.
또 양국 간 신뢰를 상징하는 통신사 호칭도 임진왜란 직후 한동안 쓰이지 않았다. 조선은 1607∼1624년 사절단의 명칭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만 불렀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대한 회답과 조선인 포로를 환국시키겠다는 사절단의 목적만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1636년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은 다시 조선통신사의 호칭을 회복하게 된다. 명에서 청으로 권력이 교체돼 중화질서가 붕괴되면서 조선과 청이 책봉체제에서 벗어난 독자적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는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과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김태환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오재희 전 외무부 차관, 강남주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학술위원장, 정태익 한국외교협회장,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등 22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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