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소에 새로 마련된 공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돌이켜보는 거다. 9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전은 전시라기보다 장소에 적합한 공간을 고민해 제안하는 이벤트에 가깝다. 갈대 그늘을 넘다 조각난 햇살이 열을 잃고 빛만 쥔 채 와락 쏟아진다. 바람은 원래 가진 자신의 소리를 증명하듯 온갖 모양과 세기를 달리해 일렁인다. 밤에는 물 머금은 나무와 돌이 달아오른 주변 공기를 불러 모아 달래고 어른다. 원래 여기에 뭐가 있었더라. 기억이 희미해진다.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별관인 PS1이 매년 개최하는 건축 전시 프로젝트다. 1998년 시작해 2010년부터 칠레, 이탈리아, 터키로 연계행사를 확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를 통해 지난해부터 참여했다. 올해는 심사위원 10명이 후보작 27개 가운데 건축사사무소 SoA 강예린(42) 이치훈 소장(35)의 ‘지붕감각’을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했다. 부부 건축가인 두 사람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15 젊은 건축가상’도 받았다.
최종 후보 다섯 팀에 부여된 공간 구성 주제는 ‘물, 그늘 쉼터’였다. 미술관 2층 제8전시실에서 최종 후보들이 제안한 공간기획안을 모형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SoA의 모형과 스케치는 언뜻 보기에 그중 가장 볼품없다. 듬성듬성 얽은 철제 기둥에 갈대로 엮은 커다란 발을 이불 널 듯 얹어놓은 형상. 이게 뭔가 싶다.
원래 이곳은 석재 패널로 덮은 네모꼴 공터였다. 두 건축가는 그 위에 먼저 최대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지름 25m. 그 위에 빗물이 빠지도록 잔돌을 깐 뒤 소나무 껍질 조각을 3, 4cm 두께로 덮어 올렸다. 소나무 껍질은 나무를 심은 뒤 뿌리 주변에 덮어 수분이 흙에서 덜 증발하도록 돕는 조경 재료다. 그리고 아연을 도금한 강철 파이프로 기둥을 엮어 올렸다. 가장 높은 중앙부 높이는 10.7m, 가장자리는 7.8m다.
갈대는 전남 순천만이나 경남 창녕군 우포늪에서 만들어 보려 했지만 결국 제작자를 찾지 못해 중국 산둥(山東) 성에 주문했다. 플라스틱으로 코팅한 철사로 얽은, 총 길이 2.5km의 갈대발 400여 개를 스테인리스스틸 와이어로 지탱하며 기둥 위에 올렸다.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하중과 바람의 영향을 계산해 규모와 형태를 결정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바닥에 갈대 돗자리를 듬성듬성 던져놓았다. 깔고 누워보자. 물 머금은 소나무 냄새가 훅 다가든다. 그늘인 듯 빛 조각 떨어지는 공간. 두 건축가는 사용한 모든 재료의 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부여받은 표제어를 직설적으로 공간에 풀어냈다. 어렸을 때 이불과 의자로 비슷한 ‘공간 놀이’를 한 기억이 살아난다. 지붕에 관한, 기억의 한 원형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