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남짓의 길지 않은 여정에 많은 성지를 둘러봤기에 어쩌면 달리는 말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것은 가톨릭 성인(聖人)들에 얽힌 스토리텔링입니다. 산티아고(성 야고보의 스페인어 표기)에는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당시 세상 끝으로 여긴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한 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순교했고, 이후 제자들이 그 유해를 이곳에 안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아빌라는 데레사 성녀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근 작은 도시 알바 데 토르메스의 한 수도원에는 수백 년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심장과 한쪽 팔이 보존돼 있습니다.
톨레도의 대성당을 찾는 이들은 성모자상 앞에서 무엇에 끌린 듯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성모자상 중에서 드물게 환하다는 미소 때문이죠. “그 미소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몇 도 각도에서 봐야 한다”는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야고보의 유해가 진짜 묻혀 있을까요? 데레사 성녀의 심장은 정말 썩지 않을까요? 신앙의 유무에 따라 신비한 종교현상에 대한 입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 따라 삼천리’일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비(非)가톨릭 신자들조차 성인들에 얽힌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야고보의 무덤을 두 팔로 껴안고, 데레사 성녀의 심장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의식에 동참했습니다.
산티아고를 비롯한 성지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가톨릭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의 신자와 무신론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블랙 마돈나가 있는 몬트세라트 성지에서 만난 안톤 야스퍼라는 젊은이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독일 출신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달리 교회 내부의 쇄신을 선택한 이냐시오의 흔적을 보는 소감을 묻자 “개신교 신자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가톨릭 성인들과 관련한 성지들을 둘러봤는데 많은 걸 배웠다”고 했습니다.
스토리텔링에 매혹된 사람들이 이 도시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처지에 따라 순례 또는 관광으로 조금씩 색깔이 바뀔 뿐이죠.
문득, 이웃 종교의 종교시설 또는 성지화 과정에 거부감이 큰 국내 종교계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종교적 스토리텔링, 그것은 갈등과 다툼의 원인이 아니라 서로 지켜줘야 할 매력적인 우리 문화의 자산 아닌가 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