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34>신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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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화자는 낙관도 여럿 갖추고 춘란도 몇 촉 키우며 사는 사람. 취향과 성품은 선비의 그것인데, 옛날 선비와 달리 부엌일도 한다. ‘당신’은 소고기를 사와서 ‘신문지 째로’ 화자에게 건네네. 소고기뭇국을 끓이라는 건 아닐 것이고, 쉬는 날에 샤부샤부를 하거나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굽는 건 으레 화자인 듯. 가장이 조리한 소고기 두어 근을 맛있게도 먹고 난 뒤 다른 식구들은 외출했나 보다. 화자 혼자 집에 남아 신문지를 펼쳐 놓고 손톱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 잘린 손톱발톱이 튀어야 신문지 위인 느긋함으로 개운하게 손톱발톱을 깎자 어쩐지 가슬가슬 끄물끄물했던 이 일요일 오후가 산뜻해진 듯한 화자다.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라는 동심이 느껴지는 표현을 필두로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며 화자는 거기 실린 기사보다 사뭇 훌륭한 신문지의 쓸모를 이모저모 펼친다. 언론으로서의 신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선비답게 에둘러 가하는 것. ‘춘란 몇 촉을/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 벼슬아치들의 썩어빠짐을 건들지 못하는 정치면에는 춘란이라도 펼쳐 놓고 그 썩은 뿌리를 가다듬잔다. 사회면에는 온통 흉흉한 기사, 오랜만에 낙관이나 꺼내 찍어볼까. 붓글씨 연습을 해도 좋겠지. 정치도 그 무엇도 내 생각, 여론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면서 시끄럽고 흉흉하기만 한 언론 매체들. 그래도 신문은 신문지로 쓸 데라도 많다네. 조용하기도 하고. ‘굴풋한 날’이랄지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이 소탈하니 예스러운 표현은 유종인의 것임.

황인숙 시인
#신문#유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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