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백의 발상의 전환]<26>실체 없이 기억으로만 남는 작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7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영진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김영진 작가
우리의 통념상 미술작품이란 형태를 지닌 어떤 대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무형의 작업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1960년대부터 시작된 퍼포먼스다. 이는 대개 작가 스스로 퍼포머가 되어 한 번의 실행으로 끝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작품 대부분이 비디오로 기록되고 그 내용의 저작권은 보장된다.

이런 무형의 퍼포먼스에서 그나마 기록마저 없애버려 작품을 완전히 비물질화하는 작가가 있다. 영국 태생의 독일 작가 티노 세갈(Tino Sehgal)은 퍼포먼스 영역에서 혁신성을 인정받아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최고상(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 ‘무제(Untitled)’(그림·2013년)는 두 사람이 전시장 바닥에서 안무에 따른 몸동작을 펼치며 비트박스 음에 맞춰 소리를 낸다. 작가가 ‘해석자’라고 부르는 퍼포머들은 한 작품에도 여럿이 동원되고 계속 교체된다.

세갈의 작품은 비디오 및 사진 등 일체의 기록으로 남지 않으므로 당시의 행위 자체로만 존재한다. 더구나 작가 스스로 행하는 일반적인 관행과 달리, 퍼포먼스의 매뉴얼을 ‘해석자’의 몸을 빌려 구현한다. 작가는 음성, 언어, 움직임 그리고 타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구축된 상황’을 연출한다.

3년 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터바인홀에서 그는 스토리텔링만으로 이뤄진 퍼포먼스를 연출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자원자 70명이 인생역전의 스토리를 낯선 관람자들에게 털어놓으며 개별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이 ‘라이브 대화방’에 처한 참여자들은 평소에 나누지 못하는 강도 높은 실제 이야기를 나누며 일시적으로나마 친밀한 인간관계를 체험했다.

여기서 작가에게 미술작품이란 퍼포먼스의 개념을 잡고 연기자의 오디션을 보고 이들의 동작을 훈련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한 퍼포먼스의 개념은 각 참여자의 몸을 빌려 조금씩 다르게 해석된다. 이때 자신의 작업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원칙에 따라 그의 작품은 오로지 참여자와 관람자의 기억에만 의존한다. 인간의 근본적 표현방식을 활용해 연출된 실제 상황이 온전히 인간에 의해 전수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세갈은 작업의 핵심 주제만 제시할 뿐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여러 사람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다. 그러기에 그 결과는 매번 다르다. 개별적이고 고유한 경험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한시적이고, 이 모든 것은 각자의 기억에만 남을 뿐이다. 삶의 방식과 똑같다.

전영백 홍익대 예술학과(미술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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