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 부제는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 그러나 작품을 내놓은 주인공인 덴마크 패션디자이너 헨리크 빕스코우(43)는 ‘경계’에 대해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인 듯했다. 9일∼12월 31일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첫 아시아 개인전은 패션디자인이 런웨이에 속박된 작업이 아님을 흥미로운 실물로 증명한다. 잔뜩 짓눌렸다 터져 버린 욕망처럼 벽에서 울 섬유가 뿜어 나온다. 분명 겨울옷 충전재인데, 아름답다. 》
검은 플라밍고의 목을 극단적으로 늘린 인형을 매단 헨리크 빕스코우의 패션쇼 런웨이. ‘죽은 닭을 천장에 매단 도살장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치고는 인형이 귀엽다’고 묻자 그는 “무거운 주제를 꼭 끔찍한 이미지로 표현할 까닭은 없다”고 답했다. 대림미술관 제공
빕스코우는 파격적 의상과 런웨이 디자인으로 해마다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 복판에 서는 한편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사진, 설치, 영상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일렉트로닉 밴드의 드러머로 활동하면서 아이슬란드 뮤지션 비외르크의 공연 의상, 노르웨이 국립발레단 무대 의상 디자인을 맡는 등 온갖 영역을 넘나든다. 하지만 ‘멀티 크리에이터’라는 수식에 대해 그는 “난 아티스트가 아니다. 디자이너”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 뉴욕에 가 보면 모든 사람이 아티스트다. 나는 ‘아티스트’라는 말이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패션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관념을 실물에 반영해 스토리텔링을 풀어 가는 방식에서 유사성은 있다. 경계를 나눌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같진 않다.”
―열 살 때부터 악기를 연주했다. 음악과 패션디자인 사이의 경계는 어떤가.
“20대 중반까지 내 창조 활동의 중심에는 음악이 있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 뒤를 쫓아 영국 런던의 디자인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 들어갔고, 삶이 확 바뀌었다. 음악이 여전히 모든 창조적 열정의 근원이지만, 프로페셔널 음악인처럼 살아갈 생각은 없다. 내 음악만으로 두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걸 이젠 안다.”
옷걸이로 손잡이를 만든 꼭두각시 인형 ‘러시안 보이’를 든 헨리크 빕스코우.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이 인형으로 공연을 한 그는 “인체의 관절을 관찰하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인 퍼포먼스”라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2008년 선보인 ‘민트 인스티튜트’ 등 런웨이 디자인을 이번 전시에 옮겨 왔다. 공간적 제약이 상당했을 듯한데….
“민트 인스티튜트는 ‘박하’라는 물질의 모든 감각적 특징을 풀어낸 무대였다. 사진으로는 밝은 민트색 합성수지 구조물만 보이겠지만 민트의 향, 민트 느낌의 음악을 뒤섞어 후각, 청각, 촉각을 뒤덮었다. 구조체 사이 공간을 좀 더 좁혀야 했는데 건물 화재 위험 때문에 뜻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디자인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건축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재료와 구조에 대한 천착은 그 시절의 영향일까.
“그럴지도…. 나는 드러머인가 디자이너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자아 분석에는 관심 없다. 이제껏 해 온 일을 재료 삼아 지금 하고 싶은 작업에 집중하려 한다. 뇌를 활동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노력에서 쾌감을 느낀다.”
7년 전 선보인 ‘민트 인스티튜트’ 런웨이를 재현한 4층 전시실. 당시 패션쇼 영상을 중앙 스크린에 상영하고 전시실 벽면을 민트 이미지의 합성수지 구조물로 채웠다. 대림미술관 제공―사진 작품 ‘Fragile Soap Bodies’ 등에서 신체의 유약함과 한계에 대한 연민이 엿보이는데….
“비눗방울 너머로 왜곡돼 보이는 나체 모델의 이미지를 촬영했다. 2초도 되지 않아 꺼져 버리는 방울도, 10초 이상 눈앞에 머무는 것도 있다. 모두 사라진다는 것만 예측 가능하다. 패션의 동력은 완벽함에 대한 욕망이다. 하지만 완벽하길 꿈꾸는 인간의 몸은 사실, 비눗방울을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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