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첫 ‘백화점 안 이발소’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바버숍인 ‘헤아(Herr)’와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클럽모나코를 운영하는 SK네트웍스가 분점 제안을 하면서 바버숍이 롯데백화점 본점 안에 들어오게 됐다. 그렇다 보니 백화점 내 점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정이 전통적인 옛 이발소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면도는 고객과 이발사의 ‘교향곡’
면도 거품은 기존 제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솔을 문질러 거품을 내는 방식이다. 면도를 하는 과정은 일종의 의례와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형화된 절차를 그대로 따른다. 이발을 끝내자 박준석 바버(25)는 의자 윗부분에 목 받침대를 끼웠다. 그때부터 고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얼굴을 맡긴 채 누워 면도를 즐기면 된다. 영화 ‘대부’(1972년)나 ‘언터처블’(1987년)에서 종종 살인 장소로 묘사되는 ‘이발소 장면’ 그대로다.
“뜨거우면 말씀하세요”라는 바버의 말과 함께 적당히 뜨거운 스팀타올이 얼굴을 덮었다. 5분 정도 대기한 후 면도 오일을 얼굴에 꼼꼼히 바른다. 흔히 가정에서 면도하다 얼굴을 다치는 건 스팀타올이나 오일 등 면도의 ‘사전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면도다. 바버는 한꺼번에 면도 거품을 바르는 게 아니라 볼과 턱, 입 주위 등의 순서로 부위별 거품을 바르고 면도를 시작했다. 접었다 펼 수 있는, 흉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면도칼이다. 신경과 침샘 등이 집중된 얼굴에 타인이 쥔 ‘칼’이 입술 주위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긴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사각사각’하는 면도 소리가 졸릴 정도로 편안했다. 30분이 넘는 면도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바버와 고객이 함께 악기를 연주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면도를 끝내고 이미 정리를 마친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는 것으로 1시간 30분에 걸친 이발과 면도라는 의식을 종료했다. 영화 아비정전(1990년)에 나오는 장궈룽(張國榮)처럼 포마드를 잔뜩 바른 낯선 내 모습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바버는 “앞으로도 오른쪽 가르마를 중심으로 포마드를 바르라”고 당부했다.
이곳에서는 이발과 면도 외에 파마(10만 원)와 염색(10만 원) 스타일링(샴푸와 헤어스타일링·2만 원) 등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특이하게도 숙취해소 마사지(2만5000원)도 있는데, 이는 회사원이 많은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인근 고객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까. 박준석 바버는 “하루에 4, 5명 정도가 온다”고 말했다. 백화점 안에 들어온 이발소라는 입소문이 퍼지며 고객들이 꾸준히 찾아온다. 여자친구의 쇼핑이 끝나길 기다리는 20, 30대 남성부터, 예전 이발소의 느낌을 원하는 중장년층까지 연령대는 다양한 편이다.
매장을 운영하는 SK네트웍스 관계자는 “기존 롯데백화점 본점 클럽모나코 월 매출이 1억4000만 원 정도였는데 바버숍이 들어온 후에는 2억 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 안에 들어서는 게임센터나 남성 휴게실처럼 백화점 ‘남심(男心)’을 뺏을 확실한 전략인 셈이다. 바버숍이 들어간 브랜드인 클럽모나코는 영국 런던에서 무료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매장,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베스트셀러 서적을 판매하는 매장도 운영하고 있다.
남자를 유혹하는 바버숍
오랜 유니섹스 미용실에 지친 남성들이 바버숍으로 대표되는 ‘이발소’로 복귀하는 신호도 감지된다. 서울 한남동과 홍익대 앞, 강남 등을 중심으로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롯데백화점 안에 분점이 들어선 ‘헤아’는 본점이 서울 한남동이다. 2013년 12월 문을 연 이 곳에서는 바에서 무료 위스키나 커피를 즐길 수 있고, 비즈니스센터가 설치돼 간단한 업무도 볼 수 있다. 양복점과 제휴를 맺어 이발을 하다 정장을 맞춰입을 수도 있다. 남성을 위한 ‘스타일 종합 관리’를 이발소에서 하는 셈인데, 여성 고객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낫씽 앤 낫씽(Nothing N Nothing)’도 20∼40대 젊은층이 자주 찾는 바버숍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제임스 딘과 말런 브랜도 등 옆머리를 붙이고 포마드를 바른 리젠트 스타일을 고수한다. 이 밖에 서울 서교동의 밤므, 압구정동의 블레스 등의 바버숍이 있고 부산 등에서도 속속 바버숍이 문을 열고 있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 뉴욕 등 전 세계 대도시에서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속속 복고풍 이발소들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 여성들이 가는 비싼 미장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얇아진 지갑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버지 세대의 ‘전통’을 느끼려는 남성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의 김용섭 소장은 “남자만의 공간에서 자신을 제대로 꾸미려는 사람들이 바버숍을 찾고 있다”며 “바버숍 방문을 한 달에 한 번 누리는 ‘자신을 위한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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