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년 전인 1789년 오늘, 군중이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감옥이 있던 자리는 오늘날 ‘모든 계층을 위한’ 오페라극장이 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정치적 지형만큼이나 혁명은 대륙 전체의 문화적 지형도 바꿔 놓았습니다. ‘음악의 성자’ 베토벤도 혁명의 영향을 받은 거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독일 사람인데 웬 프랑스 대혁명?”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와 가까운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19세 때 옆 나라에서 발발한 혁명에 심정적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가 공화국의 지도자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는 교향곡 3번을 썼다가 그가 황제로 등극한 사실을 알고는 분노해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죠.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혁명이 표방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에 평생 공감했습니다.
특히 베토벤은 혁명기 프랑스 음악계의 거두였던 이탈리아인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의 음악에 깊이 감복해 그를 동시대 음악가 중 최고봉으로 여겼습니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도 케루비니와 프랑스인 에티엔니콜라 메윌(1763∼1817)이 주도했던 이른바 ‘구출 오페라’의 맥을 잇는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혁명기 프랑스에서는 애국지사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가 영웅적으로 구출되는 ‘구출 오페라’가 인기를 끌었고, 케루비니와 메윌이 이런 작품을 여럿 썼습니다.
흔히 ‘운명 교향곡’으로 불리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시작 부분의 격동적인 리듬도 케루비니의 ‘판테온 찬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학설이 1990년대 제기된 바 있습니다. 프랑스가 전 유럽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베토벤은 그들의 팽창주의에 혐오를 표시했지만, 프랑스 세력이 표방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상에는 기꺼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사회에서 ‘정전(正典)’이 된 것은, 정치적 역할이 제한된 시민계급이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보수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반항심을 해소했던 것도 이유였습니다.
뜨거운 여름, 베토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레퀴엠(진혼 미사곡)’ 등 케루비니의 작품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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