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오의 우리 신화이야기]백두산 천지수의 수호신

운무에 휩싸인 백두산 천지. 최원오 씨 제공

한민족(韓民族)의 영산(靈山)이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 중국 지린(吉林) 성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전하는 구전신화 ‘천지수’에 따르면 본래 그 일대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심술 사나운 흑룡이 출현해 검은 구름을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며 백두산 주변의 물줄기를 모두 불칼로 지져버렸다. 그 바람에 백두산 주변 마을의 밭들은 거미줄처럼 갈라 터지고 곡식들은 쪼글쪼글한 나뭇잎처럼 말라비틀어져 사람들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때에 백두산 부근에 한 작은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왕에게는 달덩이처럼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재주 또한 뛰어나서 좋은 신붓감으로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흑룡이 나타나 온 나라가 황폐해졌는데 이런 참상을 보고 제가 가면 어디로 가고, 간다 한들 무슨 기쁨이 있겠어요?” 공주는 주변국 왕자들의 청혼을 모두 물리치면서 말했다. “흑룡을 물리치고 물을 되찾아오는 총각만이 저의 짝입니다.” 마침 성이 백가인 장수가 흑룡과 싸우며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히 물줄기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낸 물줄기는 흑룡의 방해로 순식간에 돌산으로 변하기가 일쑤였다.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공주는 백 장수를 찾아갔다. “지난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백두산에 있는 옥장천의 물을 석 달 열흘 마시면 흑룡을 물리칠 힘이 솟는다고 했어요. 저를 따라가요.” 사흘 밤낮 걷고 걸어 도착한 옥장천, 그곳에서 백 장수는 석 달 열흘 동안 계속 물을 마셨다. 산더미 같은 돌을 들어 멀리 던질 수 있을 만큼, 한 번 몸을 날려 수십 길 고목을 넘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솟았다.

“백두산 꼭대기로 올라가 땅을 파세요.” 백 장수가 땅을 파서 한 삽씩 던지니 봉우리가 하나씩 생겨났다. 그러기를 열여섯 번, 땅바닥 저 깊은 샘구멍에서 낭랑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백 장수는 더욱 힘을 내서 한 삽을 더 파냈다. 그 순간 밑에서 흑룡의 불칼이 솟아올라 백 장수의 앞가슴을 찔렀다. “백 장수님!” 공주의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고 흘러넘쳐 구덩이를 채우고 다시 둘의 몸에까지 차고 넘치자 백 장수가 간신히 두 눈을 떴다. 공주는 석 달 열흘 동안 백 장수를 옥장천의 물로 정성껏 치료했다. “공주님, 소인이 너무 경솔했습니다.” 완쾌된 백 장수는 조심스레 땅파기를 다시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구쳐서 ‘하늘 연못(천지·天池)’을 이루었다. “웬 놈이 백두산의 샘구멍을 튼 것이냐?” 소문을 들은 흑룡이 사납게 달려들어 불칼을 휘둘렀다. 칼과 칼이 부딪쳐 하늘을 가를 듯 빨간 번갯불이 그어졌다. 백 장수의 몸에서는 녹두알 같은 땀이 돋고, 흑룡의 몸에서는 팥알 같은 땀이 떨어졌다. “쟁강!” 마침내 흑룡의 불칼이 끊어져 백두산 북편 벼랑의 바위에 떨어졌다. 그런 바람에 바위가 쪼개져 천지의 물은 북쪽으로만 흘러나가게 되었다. 이후 백 장수와 공주는 천지 속에 수정궁을 짓고 천지수를 지키며 행복하게 살았다.

지금도 백두산 천지에는 무시로 백운흑운이 뒤섞이고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이 울리고 비가 오고 우박이 쏟아지는데, 이는 백 장수에게 패한 흑룡(자연재해의 상징)이 싸움을 걸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성은 무엇으로부터건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리더를 원하고 자연은 재해로써 그 리더의 자질을 혹독하게 시험할 뿐이다. ‘천지수’가 전하는 신화적 리더관이다.

최원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