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아닌 뇌 디스크에 새기는…평화의 싸움박질 ‘슬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6일 14시 10분


2015년 7월 26일 일요일 비. 슬램. #168 Testament ‘Low’(1994년)

어떤 사람들은 인류를 둘로 나누고 그 중 자신이 속한 부류를 정한 뒤, 남은 부류에 타인을 처넣고 간단히 밖에서 잠근다.

내게도 비정한 이분법 하나쯤 있다. ‘슬램(slam·콘서트장에서 관객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음악을 즐기는 것)을 해본 사람, 안 해본 사람.’

(다른 관객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슬램은 내가 아는 가장 건전한 폭력이다. 격렬한 음악에 맞춰 낯선 사람의 몸뚱이와 내 것을 부딪치면서 나를 실감하는 것. 부닥치러 갈 때의 짜릿한 두려움, 부딪칠 때 터져 나오는 아드레날린. 공기를 메우고 출렁이는 거대한 음파 속을 표류하면서 날 둘러싼 초면들과 ‘지금 이 기분, 너도 알지?’ 눈빛을 교환하는 것. 넘어졌지만 (역시 낯선) 서너 명의 우호적인 손길에 이끌려 툭 털고 일어설 때의 동료의식. 헤드뱅잉이 외로운 사색이라면 슬램은 치열한 토론. 이건 거의 평화의 싸움박질.

독백에 익숙해있던 난 2007년에야 처음 그 토론을 경험했다. 그해 여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섭씨 30도쯤 되던 땡볕 아래. 메인 무대 앞쪽에서 이미 관객 50여 명이 땀범벅이 돼 크래쉬의 음악에 맞춰 서클 핏(circle pit·슬램을 위해 관객이 즉석으로 만드는 원형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어 미국 메탈 밴드 테스타먼트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절정. 이거다 싶었다. 첩보영화 속 비밀요원처럼 난 군중을 헤치고 서클 핏에 다가갔다.

에헴. 이분법 메탈 꼰대로서 잠깐 잔소리. 어째 요즘 록 페스티벌엔 인스타그램을 위한 출연진만 가득한 것 같구나. 관객들도 멋진 장면이 나올 때 휴대전화 카메라나 머리 위로 들어올리기 바쁘고. 안산M밸리록페스티벌(24~26일)이 끝나간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8월 7~9일)이 남았다. 다시 슬램을 하고 싶다. 소리의 면도날이 진눈개비처럼 흩날리는 날에.

그 운명의 날. 서클 핏에 도달하자마자 난 슬램의 무아지경을 맛봤다. 10분쯤 지났을까. 급기야 뭔가에 홀린 듯 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올랐다. 아니, 체중이 족히 120㎏은 나가 뵈는 미국인 덩치의 등에 올라탔다. 난 곧 관객들의 머리 위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낮게 조율된 전기기타의 반복악절이 육중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Low’가 때마침 터져 나왔다.

SNS에 올렸냐고? 그 장면을 난 내 휴대 눈 카메라로 찍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뇌 디스크에 업로드해뒀다. 순간의 파란 하늘. 그 위를 걷는 나의 두 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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