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직후 3 · 1절 연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일본 언론이 ‘천년의 원한’이란 제목으로 기사화함으로써 혐한론을 확대했다. 일본은 한을 품은 한국이 대국으로 치닫는 것이 싫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통일 대박을 이루려면, 우리는 일본을 달래서 껴안고 가야 한다.》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이다. 6월 22일은 한일수교 50주년이었다. 양국 정상은 각기 자국에 있는 상대국 대사관이 주최한 수교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지난 수년간 한일 관계가 유례없는 경색을 보였기에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신호탄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날(6월 22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일본을 방문해 아베 일본 총리를 만났다. 경색 국면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일 경색은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 국민 사이에 확산되는 혐한(嫌韓)·반한(反韓)의식이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일부 일본 언론과 출판계의 의도적인 혐한 기사 양산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상대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의 확산이다.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지난해 6월호 ‘신동아’에 소개한 일본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씨가 주최한 ‘혐한과 반일’ 제하의 강연회(6월 13일)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어이없는 ‘일본 민심’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인의 역사적 ‘한(恨)’에 대한 무지와 오해였다. 일본인들은 경제적·군사적으로 ‘대국(大國)화’하는 한국이 그 ‘한’을 풀기 위해 일본에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평소 한국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약간의 호의를 갖던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혐오감과 불안감을 갖게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 3 · 1절 연설 내용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였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인에게는 부자연스럽지 않은 내용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설문에는 한일관계사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가 담겼다. 일본의 혐한 언론은 이를 절호의 소재로 이용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문제 삼았다.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논리적·사실적인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한반도는 한 번도 일본에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순결한 피해자’여야 하는 것이다. 유사 이래 대외전쟁을 반복해온 것이 인류 역사인지라 그러한 전제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인 ‘한국인은 주변에 휩쓸리며 당하고만 살아왔다’는 한국사의 ‘타율성’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강조의 의미로 사용한 ‘천년’은, 일본 혐한 언론을 통해 ‘천년이 지나도 일본에 대한 한(恨)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확대됐다. 그 때문에 연설의 다음 문구인 “양국의 미래 세대까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대 정치지도자들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박 대통령 연설은 일본에서 ‘천년의 원한(千年の恨み)’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그런 식의 논리라면 우리도 ‘원구(元寇)’에게 당한 지 천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부터 사죄하라’ 식의 분노를 내뱉는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한을 풀기 위해 한국은 일본에 무력적으로 복수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 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일본의 ‘대륙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의 역사, 그리고 한(恨)에 대한 양국의 언어적·문화적 개념 차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신라구’와 ‘무쿠리 고쿠리’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통한 외침(外侵)을 두려워한 역사는 대단히 길다. 기원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한반도와의 연고가 끊기자 일본은 나당연합군의 일본 침공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래서 규슈지역에 대규모로 산성을 쌓고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옮겼다.
이 위기는 신라에 의해 정리됐다. 당이 영토 야욕을 드러내자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부흥군과 함께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해, 한중일 3국의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3국 공존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리고 신라 말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해상왕 장보고가 암살당하며 해양 질서가 무너지자, 중앙정부의 조세 압력을 견디지 못한 신라 지방세력이 일본으로 눈을 돌려 규슈와 쓰시마 등지를 약탈한 것.
이들이 바로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한 대규모 해적 ‘신라구(新羅寇)’다. 그중에는 현춘(賢春)처럼 2500여 명을 태운 100척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를 습격(894년)한 이도 있었다. ‘일본기략(日本紀略)’ 등에는 ‘(신라구의 출몰로) 규슈 지역은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초토화됐다’는 기록이 있다.
수백 년 뒤 일본은 유전자에 각인될 정도로 강한 공포를 안긴 사건에 직면했다. ‘원구(元寇)’라고 칭하는 두 차례에 걸친 여몽(麗蒙)연합군의 일본 침공(1274, 1281년)이다. 여몽연합군은 ‘철포’라고 기록된 화약병기를 일본에 처음으로 선보여 충격을 줬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연합군은 상륙지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해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고려군은 몽골군의 부속병력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나, 일본은 고려와 몽골을 동등한 침략자로 인식했다. ‘가미카제(神風)’라 불리는 폭풍으로 상륙 선단이 괴멸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국가 존망의 위기까지 몰리는 상황이었다. 그후 여몽연합군은 ‘무쿠리 고쿠리(몽골 고려)’로 불리며 20세기 초까지 우는 아이를 겁줘서 달래는 공포의 대명사가 됐다.
그 공포가 현대까지 남은 증거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의 생존자들을 다룬 이부세 마스지의 소설 ‘검은 비(黑い雨)’를 예시할 수 있다. 소설에서 저자는 원폭 버섯구름을 ‘무쿠리 고쿠리의 구름’이라고 표현하며 ‘지옥의 사자’에 빗댄다.
따라서 천년이란 시한까지 제시하며 우리를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한 박 대통령 연설은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는 것이 된다. 일본인들이 ‘우리도 ‘원구’에게 당한 지 천년도 지나지 않았는데…’라고 불평하는 데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류가 있는 박 대통령 연설을 일부 일본 언론이 ‘천년의 한’이라는 자극적인 표제어로 뽑아 올리면서 그 오류가 확대 재생산됐다.
사적 보복을 인정하는 문화
그들은 우리의 ‘한’을 ‘우라미(恨み)’로 번역했다. 한과 우라미는 같은 한자를 쓰지만 개념은 사뭇 다르다. 한국인의 ‘한’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렬한 아쉬움과 분함, 그리고 인내를 우선하며 ‘안타깝고 슬픈’ 감정을 강조한다. 반면 일본인의 ‘우라미’는 타인의 처사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강조된다. 당했으면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원한’에 가까운 개념이다.
양자의 해결 방식도 다르다. 이는 양국의 대표적 고전을 읽어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의 ‘장화홍련전’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매의 한을 새로 부임한 지방관이 살인자 계모와 이복형제를 처벌함으로써 해결하는 구조다. 자매의 원혼은 신임 관리의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정당함이 증명됐기에 한을 푸는 것이다.
한국은 중앙집권체제와 주자학적 윤리관에 젖은 탓인지 합법적 절차가 결여된 직접적인 복수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가 참회하고 그것을 피해자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구조도 많다. 그러나 일본식 이야기 구조라면 크게 달라진다. 자매의 원혼이 계모와 이복형제를 직접 응징해 ‘끝장을 보는’ 스토리가 됐을 것이다.
우라미와 관련된 일본의 대표적 고전에 ‘주신구라(忠臣藏)’가 있다. ‘주신구라’의 주인공인 무사들은, 막부의 관리에게 모욕당한 것에 항거한 그들의 주군이 할복을 명받고 영지가 몰수당하는 사건을 겪자, 주군의 한을 풀기 위해 막부의 관리에게 직접 복수를 하고 자수한 뒤 할복한다. 우리였다면 끝까지 중앙정부에 직소해 왕명을 기다리고 그것으로 인해 당쟁이 일어나는 구도였을 것이다.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사법체제가 무너졌기에, 개인의 직접적인 복수를 ‘자력구제’라는 논리로 찬미하는 문화가 생겨 위와 같은 작품이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본적 의미와 해결방식이 다른 한국인의 한을 일본어의 우라미로 직역한 것은 오역(誤譯)이 된다.
일본의 혐한 언론은 한국인을 ‘우라미의 민족’이라고 강조하며,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불안과 혐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한국인이 과거사의 한을 풀기 위해 다시 원구가 되어 복수할 것이라는 논리 비약까지 감행한다. 한국인의 한 해결 방식을 그들의 우라미 해결 방식과 동일시한 것이다.
기계적 평등에 집착하는 일본
‘천년의 한’에 대한 오해에는 역사적 사실이나 언어의 뉘앙스 차이만이 아닌 사고방식의 차이도 존재한다. 한국은 주자학적 명분론에 의해 절대적으로 ‘정의’를 구별하고 독점하려 한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자기 과실이 49%이고 상대 과실이 51%인 경우, 자신이 나은 것은 2%뿐임에도 상대는 ‘절대악’, 정의는 자신에게만 있음을 강조한다. 상대에게도 나름의 명분과 배울 점이 있음에도 전부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구한말의 쇄국주의나 위정척사론이 그 예다. 대일본 관계도 대립한 시기보다 공존한 시기가 압도적으로 길었다는 것을 자주 망각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박 대통령의 연설문 구절도 그러한 ‘명분론적 족쇄’의 산물일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불교적 상대주의에 입각해 누구나 업보를 지녔다는 ‘피장파장’의 논리를 갖는다. ‘싸운 자는 둘 다 처벌한다(喧兩成敗)’는 식으로, 기계적인 정의와 평등에 집착한다. 따라서 ‘평등하게 공존하거나, 아니면 자기 파멸을 감수하며 상대와 공멸하는 것’을 택하는 극단성을 보인다. ‘추신구라’처럼 적과 공멸하는 사적 복수를 찬미하는 문화가 그러한 개념에서 나왔다.
와세다대 박사과정 학생인 사타케 고스케(31) 씨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파멸한 구(舊)일본의 확전 과정도 그러한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서구 열강은 식민지나 영토를 제멋대로 확장했으면서 후발 주자인 우리는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그들과 같은 조건으로 영토 확장을 인정받지 못할 바에는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구와 끝장을 보자”라는 논리였다는 것이다.
한일 관계사에서 실질적 피해는 전 국토를 유린당하고(임진왜란), 국권까지 빼앗긴(경술국치) 한국이 더 심했건만, 신라구와 원구를 예로 들며 분개하는 일본인(특히 우익)의 심리는 저러한 기계적인 정의의 평등론에 근거한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설득 논리를 연구하지 않는 한, 양국관계는 감정적 소모전이 거듭될 뿐이다.
“한국이 강해진다”
박 대통령 연설에 대한 오해가 생겨나는 데는 한국의 힘이 그들의 불안을 현실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것도 한 원인이 된다. 미국 최고의 외교전략가인 조지 프리드먼은 한국이 통일되면 그 힘이 만주까지 미칠 것을 예상하며 ‘통일이 되면 한국은 강대국이 될 것이고 일본에 가시(thorn)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조선일보 2011년 5월 28일). 그러한 통일한국이 일본과의 해묵은 감정만을 이유로 ‘진정한 패권주의 국가’인 중국에 기울면, 일본에는 ‘무쿠리 고쿠리’의 악몽이 부활하게 된다.
야스히코 씨는 “한국의 눈부신 대국(大國)화로 현재의 한일관계는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일을 한다면 한국은 진짜 대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일부 어리석은 일본인들은 한국이 ‘정말로 복수할지 모른다’란 두려움에 젖어, 한국의 통일을 거부하고 싶어 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미국만큼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해도 ‘재를 뿌릴’ 힘은 가졌다. ‘통일대박’을 실현하려면 일본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간으로 확산돼가는 한일관계 경색을 타파해야 한다. 양국 외교관계자들은 양국의 역사와 문화, 사고방식의 차이를 숙지하고, 민간 차원의 대화와 교류를 더 확대해 나가야 한다.
2015년은 여러 의미에서 한일관계의 중대한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변곡점에서 양국이 서로를 위해 최선의 판단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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