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중략)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교양인·2005년)
서울의 한 고등학교의 학급 게시판에는 한 달에 한 번 학생 50명의 이름이 인쇄된 종이가 붙는다. 그 달의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 전교 1등부터 50등까지의 명단이다. 명단이 붙는 날이면 친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조금씩 벌어진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들은 게시판을 보며 “이 반에서 공부하는 녀석은 역시 A뿐이구나”와 같은 날선 말들을 던진다. 천신만고 끝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아이들은 다음 시험의 명단이 나붙기 전까지 한껏 으스댄다. 명단의 서열에 따라 반장, 학생회 임원 같은 학교 내 ‘요직’이 돌아간다. 아이들의 성적에 따라 학부모회에 참석한 어머니들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거꾸로 명단에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학생들은 스스로를 학교 주변부로 밀어낸다. 공부에 자신감을 잃고 비주류라는 낙인 속에 학교에서 진학 상담을 받는 것조차 망설이기도 한다.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했던가. 이 학교의 아이들은 사람의 가치도 성적만으로 정해질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필자가 이런 사고의 위험성을 깨달은 것은 이 학교를 졸업한지 한참 지나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접한 뒤였다. 여성학자인 저자는 “세상에 완벽한 기득권자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성별과 소득 수준, 학벌, 거주지, 직업, 나이, 성적 지향, 장애 여부 등에 따라 한 가지 이상의 차별을 경험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학교를 졸업하고도 외모나 성별로 불이익을 받아 취업에 실패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니 몇 가지 기준만으로 스스로가 사회의 주류나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누군가에게 또 다른 차별의 대상이 될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고 겸손해지는 편이 현명하다. 저자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에서 우열을 구분 짓기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보듬을 때 세상은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터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어볼 만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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