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고려호일(高麗好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5일 03시 00분


《 이근배 시인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명시를 순례하는 신품명시(神品名詩)를 수요일마다 연재합니다. 1961년 등단한 이근배 시인은 시와 시조를 아우르며 역사와 문화를 시에 담아 왔으며 특히 한국 고미술에 해박하고 벼루 등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합니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고려호일(高麗好日) ―서정주(1915∼2000)

숙종 3년 시월상달 휘영청히 밝은 날.
고려 땅에 죄수는 하나도 없어
감옥 속은 모조리 텡텡 비이고,
그 빈자리 황국(黃菊)처럼 피는 햇살들.
그 햇살에 배어나는 단군의 웃음.
그 웃음에 다시 열린 하늘의 신시(神市)!
그 신시에 물들여 구은 청자들!
운학문(雲鶴紋)의 운학문의 고려청자들!


무딘 붓으로 어찌 다 이르랴, 이 겨레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손을 빌려 쓰고 그리고 깎고 다듬고 빚어내어 인류의 눈과 가슴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새겨준 저 불멸, 장엄의 내 나라 문화유산에 바치는 헌사를.

이 땅의 시인들 다투어 모국어의 가락으로 빛깔과 향기를 노래해 왔거니 그 신품에 값하는 빼어난 시를 찾아 깊고 먼 날의 시간으로 떠나고자 한다. 그 첫 순례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을 골랐다.

어느 여인의 몸매가 이리도 아리따우랴. 나라님 수라상에 올렸을 이 술병에는 하늘과 땅을 가르며 학들이 영원의 집안에서 춤을 추고 사이사이 구름이 너울거린다. 목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으로 장식하고 연꽃 봉오리로 아랫도리를 받쳤으니 불국정토가 예 아닌가. 가히 고려가 낳은 신품이요. 청자의 우주가 완성되도다.

올해 탄신 100주년을 맞는 미당(未堂)은 일찍이 비색(秘色)의 청자빛깔에 흑백상감으로 구름이며 학을 수놓은 세계 도자사의 맨 윗 봉우리를 우러르며 “단군의 웃음에 열리는 하늘의 신시”에서 구웠으리라고 짐짓 한 수를 뽑아낸다. 누가 있어 여기에 한 글자를 더 보태고 뺄 수 있으랴.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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