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부임후 목회 방향… 비판적 영성서 예술적 영성 전환
교회는 개별 NGO 돼선 안 돼… 우리 삶 위한 큰 틀 철학 제시해야
정권 바뀌어도 통일정책은 한 틀로 통일문제 국내 정치 이용 말아야
《 “요즘 기업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교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은 프라이빗 비즈니스(private business·개인사업)가 아니라 소셜 서비스(social service·사회적 봉사)다.” 올해 말 은퇴를 앞둔 서울 중구 장충단로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70)의 말이다. 1945년 12월 창립한 경동교회는 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이자 작고한 김재준 강원용 목사가 담임 목사를 맡아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독일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박 목사는 개신교 내 통일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최근 경동교회 담임목사실에서 그를 만났다. 》
경동교회는 ‘해방둥이’다. 박종화 목사는 70주년을 맞는 소감에 대해 “우리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나라와 민족을 섬겨 왔다”며 “사회에서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기둥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99년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맡은 이후 16년간 역할을 평가한다면….
“낙제점은 면했는지 모르겠다(웃음). 민주화 이후 교회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과거 비판적 지성이 주류를 이뤘다면 이후에는 문화, 예술적 영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있나.
“유학 시절 독일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을 포함한 외국인들을 포용하는 것을 지켜봤다. 귀국하니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 사회의 ‘현대판 민중’이었다. 개신교에서는 최초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 안방으로 모시자’고 했더니 이른바 ‘우리 집 마당에서는 안 된다’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있었다. 그래서 ‘핌비(PIMBY·please in my backyard), 제발 우리 집 마당으로’라며 설득했다. 지금도 매월 1, 3주 일요일 오후에는 무료 진료가 진행되고 있다.”
―부임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비판적 영성에서 문화, 예술적 영성으로 바뀐 것인데 갈등은 없었나.
“유신 시대에는 교회나 가야 비판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개별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은 비정부기구(NGO)의 몫이다. 교회가 개별 NGO가 돼서는 안 된다. 교회는 우리 사회와 삶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큰 틀의 철학을 제시해야 한다.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자 분들이 이런 뜻을 조화롭게 받아들였다.”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 기능인, 전문가는 많아졌는데 어른은 없다. 과거 강원용 목사와 김수환 추기경, 월주 스님이 함께 일하면서 정치 활동한 것 아니지 않으냐. 이분들은 화합과 일치를 얘기했고,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 원로들의 역할은 이런 것 아닌가. 가끔 높은 분 만나는 모임에 가면 기도와 축복을 한 뒤 자신과 관련된 민원을 얘기하더라. 이런 것은 아니다.” ―독일 통일의 교훈은….
“정권은 바뀌어도 통일정책은 한 틀로 가야 한다.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기가 철로의 양쪽 평행선처럼 다르다. 통일문제에 대한 ‘독일의 제1원칙은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인 내용은 교회를 비롯한 NGO에 맡겨야 한다. 국가가 계속 나서면 큰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옛 서독은 1963년부터 대가를 지불하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프라이카우프(Freikauf)’를 교회에 맡겼다. 3만3000여 명의 정치범이 석방됐다.”
―교회나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반대나 비판이 아니라 ‘세움’의 철학이 필요하다. 반대는 쉽지만, 세우려면 타협하고 화해하고 양보해야 한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과 같은 조화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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