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짬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3일 03시 00분


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난 짬뽕.” 1990년대 KBS 코미디프로 ‘한바탕 웃음으로’의 코너였던 ‘봉숭아학당’에서 ‘맹구’(이창훈 분)가 유행시킨 말이다. 선택의 순간, 그는 언제나 남들과 달리 자지러질 듯한 목소리로 ‘짬뽕’을 외쳤다. ‘봉숭아학당’은 나중에 개그콘서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중국집에만 가면 짬뽕과 짜장면을 놓고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허나 먹거리 세계와 달리 현실에선 짜장면의 처지가 훨씬 낫다.

경직된 어문규범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짜장면은 2011년 8월 31일 표준어가 됐다. 그러나 짬뽕은 아직도 중국 음식인 ‘초마면(炒碼麵)’으로 고쳐 사용하란다. 사전대로라면 중국집에 가서 ‘초마면 주세요’라고 해야 옳다. 초마면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어떻게 초마면으로 순화할 수 있겠는가.

사전은 짬뽕을 ‘국수에 각종 해물이나 야채를 섞어서 볶은 것에 돼지 뼈나 소 뼈, 닭 뼈를 우린 국물을 부어 만드는’ 중화요리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1999년에 나온 표준국어대사전과 비교해 보면 ‘소 뼈, 닭 뼈’ 등만 더해졌을 뿐 초마면으로 순화해서 사용하라는 건 그대로다.

짬뽕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19세기 후반 일본 나가사키에 살던 중국 푸젠 성 출신 천핑순(陳平順)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난한 중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을 위해 값싸고 푸짐한 요리를 개발했다. 그게 ‘나가사키 잔폰’이다.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짬뽕’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전은 ‘짬뽕(일·champon)’을 일본말로 규정하고 있다.

나가사키 잔폰은 우리가 먹는 짬뽕과 달리 맑은 국물의 맵지 않은 요리다. 우리나라의 짬뽕은 고추기름과 고춧가루를 쓰면서 빨갛고 얼큰한 맛으로 바뀌었다. 짬뽕의 뿌리는 초마면일지 모르지만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걸 일본을 거쳐 중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초마면’으로 순화하라니….

짬뽕은 음식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언중은 짬뽕을 ‘짬뽕 인생’ ‘소주 맥주에 양주까지 짬뽕으로 마셨다’처럼 서로 다른 것을 뒤섞었다는 의미로 확장해서 사용한다. ‘웃기는 짬뽕’처럼 욕설로도 쓴다. 짬뽕은 그야말로 시간과 정서가 쌓이면서 의미와 용도가 늘어나고 있는 낱말이다.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재벌 형제의 싸움이야말로 ‘웃기는 짬뽕’이다. 아니, 짬뽕이 아깝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짬뽕#초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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