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빻은 가루를 풀에 개어 발라 굳힌 거다. 유럽 가서 공부하다가 그리스 과학자를 만나 결혼한 뒤 손에 넣은 ‘그리스의 재료’다.”
수채화 종이 위에 다양한 재료를 붙이고 찢어내 표현한 ‘Hatching(부화)’ 연작. 톡톡한 질감을 희미하게 덧입혀 도드라지도록 만든 부분의 재료를 묻자 김명남 작가(54)가 호방한 웃음을 섞어 답했다. 9월 16일까지 서울 중구 신세계갤러리에서 개인전 ‘빛의 묘법’을 여는 그는 1993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호흡기 질환 탓에 유채 물감을 쓰기 어려워 주로 그린 수채화로는 국내 화단에서 ‘비주류’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였다.
“붓에 찍어 바르는 물감에 대한 고민을 털어내고 그 바탕이 되는 종이의 물성(物性)에 주목했다. 수채화 종이 위에 건축자재로 쓰는 세 겹 종이를 구해 덧바르고 한 겹씩 뜯어냈다. 거기에 최소한의 색을 칠한 다음 대리석 가루 풀을 입혀 부분적으로 질감에 변화를 줬다. 표현 재료가 화가의 입지에 영향을 미치는 이상한 미술계 풍토에 근본적인 방법으로 내 나름의 저항을 해본 거다.”
5년 전 녹내장 증상이 시작돼 색상 구별이 어려워지면서 재료의 물성에 대한 천착은 아예 아무 색도 칠하지 않고 미세한 바늘구멍만 뚫어 이미지를 구성하는 작업으로 변형됐다. 무심히 뜯고 뚫고 칼로 그어낸 입체가 종이 위에서 기이한 형상을 갖춘다. 처음에는 구멍을 연결한 선 마디에 건축모형에 쓰는 인물 미니어처를 붙였다. 무명실로 종이 위에 바느질 자국을 얹기도 했다. 지금은 다 떼어내고 빈 구멍만 남겼다.
“내가 살아오며 머문 공간의 표식처럼 종이 위에 구멍을 냈다. 별자리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없었다. 플라스틱 미니어처는 재미있게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갈수록 부끄러워져서 없앴다. 내가 직접 만든 게 아닌 기성품이니까.”
백화점 꼭대기 층의 부설 갤러리는 대개 그다지 차분한 공간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몰려나온 수다꾼들의 자욱한 소음 탓에 시선과 신경을 작품에 고정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김 씨의 작품은 차분히 가라앉은 절제의 분위기로 수다의 기운을 눌러 꺼뜨린다. 진지한 성찰의 고민은 작품에 다 털어 넣고, 작가는 유쾌한 발랄함만 걸친 채 거기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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