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개가 산골 부자보다 낫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산간벽지는 길이 막히거나 좁아서 교통과 교역이 불편하다. 반면 강이나 바닷가는 물길을 따라 도로가 열리고 각종 물산과 사람들이 오가며 자연스레 시장과 도시가 발달한다. 그러니 해변 개가 산골 부자보다 먹을 게 많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돈 되는 곳’임은 동서와 고금이 똑같다.
물가 혹은 물길은 예전부터 부를 축적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다. 풍수에서도 그렇게 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시내와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고 말했다. 물을 만나야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택리지’의 논리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집터를 고를 때도 금과옥조였다.
풍수에서는 돈을 부르는 물이 있는 곳을 귀한 터, 곧 명당이라 한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돈 냄새’를 잘 맡는다는 부자들이 그런 터를 애써 구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자들만큼 풍수를 좋아하는 집단도 찾아보기 어렵다. 부의 원천이 터에 있다는 풍수적 믿음은 우리나라 부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재벌그룹이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서울 종로구 서린동의 SK그룹 사옥은 부자들의 풍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부와 물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 중 하나다. 1999년에 완공한 SK그룹 서린동 사옥은 재물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명당으로 손색이 없다.
일부 풍수가들은 이 터가 북한산에서 기원한 용맥(龍脈·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이 삼청공원을 거쳐 남쪽으로 흐르다가 청계천을 만남으로써 지기(地氣)가 응집돼 명당이 됐다고 말한다. 이는 중국식 풍수이론으로 이 터가 용맥에서 기원한 유동형지기(流動形地氣)의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엔 지세(地勢)가 너무 약하다. 오히려 통일신라시대까지 전승돼온 우리식 풍수 읽기로 설명하는 게 맞을 듯싶다. 우리의 전통 풍수로 보면 이 터는 땅속에서부터 곧장 솟아오르는 상승형지기(上昇形地氣)가 지상 36층 규모의 사옥 전체를 덮을 정도로 매우 세다.
아쉬운 점은 이런 지기가 작동을 잘하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줄 ‘물 기운’이 부족하다는 것. 이럴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비보(裨補)풍수’다. 약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보강해주는 풍수적 장치를 가리킨다. 서린동 사옥 완공 당시 손길승 SK그룹 회장(현 SK텔레콤 명예회장)은 빌딩에 물의 상징인 거북 모양을 새기도록 풍수비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옥이 있는 서린동은 화기(火氣)가 승한 자리라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는 수(水)의 기운인 거북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현재 서린동 사옥은 거북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물(거북)을 상징하는 어두운 장방형 건물의 남쪽 정문 앞에는 점 8개로 상징한 거북의 머리를, 북쪽 후문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거북의 꼬리를 새겨 놓았다. 또 건물의 네 귀퉁이 기둥 아래에는 5개의 발가락을 가진 거북의 발 문양을 새겨 넣었다. 언제부턴가 사옥 정문 앞쪽에는 장방형의 돌 수조도 만들어 놓았다. 거북이 사시사철 물을 축이도록 한 풍수적 조치다. 이로써 서린동 사옥은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명당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작(人作)은 자연의 선물인 천작(天作)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던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영구음수형 사옥에 입주하고 나서 SK그룹 총수들의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는 터의 주인이 직접 비보를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 사옥은 수덕(水德)을 가진 경영자가 이끌어야 물을 갖춘 재물 명당으로서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물은 순리를 따라 아래로 흐르되 작은 빈틈도 놓치지 않고 적셔드니 마치 지혜를 갖춘 자와 같다.”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고난을 딛고 수덕의 경영 능력을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