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고난의 연속.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네 삶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고난을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를 도와 줄 누군가가 나타났으면, 어려움을 함께 나눌 무언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봄 직한 상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작가 후지코 F후지오의 만화 ‘도라에몽’은 어쩌면 필연적인 등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라에몽은 겁 많고 별 볼 일 없는 초등학생 ‘노진구’를 돕는 것은 물론이고 지쳐 쓰러진 그를 등에 업고 집에 오는, 마치 직장 상사를 부축하는 부하 직원이 되기도 한다. 129.3cm의 키에 2등신 비율을 가진 우스꽝스러운 이 고양이 로봇이 벌써 탄생 45주년(연재 시작 시점 기준)을 맞았다. 인기는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12일 3차원(3D) 영화 ‘스탠바이미’의 DVD가 출시됐고 다음 달 17일에는 극장판 영화 ‘진구의 우주영웅기∼스페이스 히어로즈∼’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만화책으로 시작해 TV 만화, 영화 등 콘텐츠는 45년째 이어지고 있다. 3D 영화, 우주 영화… 끝없는 도라에몽
2112년 9월 3일에 태어난 도라에몽은 미래에서 온 고양이 로봇이다. 노진구의 자손이 “내 인생이 노진구 때문에 불행한 것 같다”며 자신이 갖고 있던 로봇인 도라에몽을 노진구의 방으로 보낸다. 한마디로 노진구의 불운한 인생을 바꾸고 대대손손 영화(榮華)를 누리기 위해 도라에몽을 그의 옆에 붙인 것이다.
도라에몽이 그를 시시각각 ‘봐 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 노진구는 시험을 보면 늘 0점을 맞을 만큼 공부를 못하고 야구를 하면 공을 잡지도 못할 정도로 운동 신경도 좋지 않은 편이다. 덩치 큰 동네 친구(퉁퉁이)는 그를 두들겨 패고 부잣집 아들(비실이)은 변변찮은 그를 대놓고 무시한다. 이런 가운데 노진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이슬이)이 모범생(영민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열등감도 가진다. 심지어 시력도 나빠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 하나 잘난 것이 없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진구를 도와주는 도라에몽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도라에몽은 귀가 있었지만 쥐가 그의 귀를 갉아먹었다. 그 이후로 고양이임에도 쥐만 나타나면 극도로 흥분하며 도망을 다닌다. 귀가 사라졌다는 슬픔에 울면서 뛰다가 원래 피부색(노란색)이 벗겨지면서 지금의 파란색이 됐다. 이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노란색의 고양이 로봇들 무리에 끼지 못한다. 누군가를 도와주러 왔지만 그 자체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영웅’급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불완전하기는 노진구처럼 마찬가지다.
하지만 날렵한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이 가지지 못한 도라에몽만의 매력은 있다. 자신의 배에 있는 4차원 공간인 주머니에서 갖가지 도구를 꺼낸다는 점이다. 하와이에 가고 싶다는 노진구를 위해 문만 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어디로든 문’을 꺼내고 ‘스몰라이트’로 등장인물들의 몸을 작게 해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한다. 현재 만화 원작에 나타난 도구 수만 1963개인 것으로 조사 됐다.
대단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영웅
작가 후지코 F후지오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한 이래 도라에몽은 현재까지 만화 단행본 51권에 에피소드만 1330개가 넘으며 영화는 35편에 이른다.
국내는 1980년대 ‘동짜몽’이라는 해적판으로 도라에몽 만화가 소개된 적이 있다. 이후 1995년 정식으로 라이선스 판이 발행된 이후 현재까지 소개되고 있다. 현재 도라에몽의 대표 팬클럽인 네이버 카페 회원 수는 1만5000명이 넘는다. 올해 2월 국내 개봉한 3D 영화 ‘스탠바이 미’는 6개월 만인 이달 12일 DVD로 발매됐다. 다음 달 17일 우주를 배경으로 한 모험 영화 ‘진구의 우주영웅기∼스페이스 히어로즈∼’의 개봉을 앞두고 이달 28일부터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아이파크몰에는 ‘도라에몽 100마리’ 대규모 전시회도 열린다.
45년의 역사를 가졌으니 이에 대한 의미 부여도 남다를 것이다. 타임지(誌) 아시아판은 2002년 4월 ‘아시아에서 껴안아 주고 싶은 영웅’ 25명을 선발했는데 그중 하나로 도라에몽을 뽑은 바 있다. 일본 도야마(富山) 시 국립대인 도야마대(富山大)는 아예 ‘도라에몽 학문’을 만들었다. 최근 이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도라에몽 캐릭터가 만든 만화, 영화, 캐릭터 상품 등 매출은 현재까지 약 1500억 엔(약 1조4259억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45년 동안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도라에몽, 노진구 등 주인공 모두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해 보이는데 그 모습이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반응이 다수다. 만화의 배경 역시 마찬가지. 불기둥 속이나 붕괴된 건물 등 ‘극적인’ 곳이 아닌 조용한 동네, 일상이어서 친근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레이제이 아키히코(冷泉彰彦·56) 일본 칼럼니스트는 최근 일본 뉴스위크를 통해 “서구의 슈퍼 히어로처럼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캐릭터와 달리 도라에몽 속 등장인물들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등 현실성 있는 모습에 사람들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 게임하고 사진찍고… 도라에몽과 함께 놀자! ▼
신지토세 공항의 ‘와쿠와쿠 스카이파크’
신지토세 공항은 일본 홋카이도의 대표 도시 삿포로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3층에 2011년 도라에몽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 ‘와쿠와쿠 스카이파크’가 들어섰다. 공항에 만화 캐릭터 테마파크가 들어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 시에 있는 도라에몽 박물관이 작가 후지코 F후지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곳은 도라에몽 캐릭터와 함께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도라에몽 만화의 배경 장소와 주인공들, 미로 등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인 ‘파크 존’을 비롯해 영화와 책 등을 볼 수 있는 ‘라이브러리 존’, 가족이 함께 도라에몽 만화를 그리고 색칠을 할 수 있는 ‘워크숍 존’, 스티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어뮤즈먼트 존’ 등 7곳으로 구성됐다. 와쿠와쿠 스카이파크 곳곳에는 도라에몽 구조물들이 설치돼 있다. 카페 점원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안내문에도 ‘잠자는 도라에몽’ 사진이 있을 정도다.
7곳 중 가장 핵심 공간인 파크 존에 입장료 800엔(약 7617원·성인 기준)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만화의 주 배경 장소인 ‘노진구의 방’이 나온다. 도라에몽은 그의 방에 있는 책상 서랍을 통해 미래에서 현재로 올 수 있다. 이어 등장인물들이 주로 모이는 공터, 그 옆에는 대형 화면을 통해 팔의 움직임으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한 게임 공간 등이 잇달아 나타났다.
체험에 초점을 맞춘 공간인 만큼 ‘트릭 아트’를 접목해 도라에몽의 비밀 도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조명의 조도를 달리 해 마치 도라에몽의 타임머신에 함께 탄 것 같은 느낌을 준다든지 공간 위치에 따라 사람의 키가 달라보인다든지 하는 공간들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출구 전 무대에서 도라에몽이 나타나 관람객들과 사진을 찍는다. 물론 사람이 도라에몽의 탈을 쓰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이다. 129.3cm의 키, 2등신 비율을 완벽히 ‘고증’을 할 수 없기 때문인지 몰라도 관람객 앞에 나타난 도라에몽은 다소 키가 크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보다도 함께 온 어른들이 더 반기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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