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서 나뭇잎이 돋아나고 금세 우리들의 교실은 학교 안에 울창한 참나무 숲을 이루리라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이면 옹기그릇은 한 덩이 진흙으로 풀어지고 숟가락은 밥과 그릇을 버리고 출렁이는 광맥 속으로 되돌아가리라 보아라 저 도시에서 굳은 약속으로 만났던 시멘트와 물과 모래들이 뿔뿔이 이별하는 것을, 커피에 타 마시던 설탕가루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멕시코 사탕수수밭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아라 콜라는 물이 되고 우리 사랑은 불이 되는 것을 어느 날 어른이 된 사람들은 늙은 어머니의 자궁 속을 찾아 떠나고 닭들은 달걀 속으로, 우리가 부르던 크나큰 노래들은 악보 속으로 빨려들겠지만, 어느 날 무덤 열고 할아버지가 헛기침하며 걸어나오시고 강물이 조금씩 거꾸로 흐르리라 강물 따라 모여 흐르던 집 나간 내 눈물들이 비로소 눈 속으로 돌아올 때 내 스스로 살아온 날들을 펼쳐 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추억 속에 숨어 있는 우리 고향을 만나리
거꾸로 보라, 다르게 생각하라는 말이 교실에도 일터에도 차고 넘치지만, 이 시만큼 그에 어울리는 예도 드물 것 같다. 역발상과 창의성의 전초기지는 시가 아닐까.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시인은 뒤로 간다. 그걸 ‘돌아갈 귀(歸)’자 하나로 다채롭게 풀어낸다.
그릇은 흙이 되고 시멘트는 물과 모래와 헤어지고, 숟가락은 광맥 속으로, 설탕은 사탕수수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의자는 숲이 되고, 할아버지는 다시 살아나고, 눈물은 눈에 돌아와 고인다. 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귀(歸)’는 돌아감과 돌아옴을 다 품은 말이다.
처음이자 근원인 곳으로 돌아가는 일은 저 자연의 소관이겠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것들은 특별한 노력 없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시인은 그 노력을 ‘눈물’, 즉 울음이라 말한다. ‘고향’은 슬픈 부름 끝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면서 여기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티끌 뭉치이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을 진실로 긍휼히 여겨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작년에 바다에서 삼백이나 되는 목숨이 어딘가로 돌아가는 걸 보았다. 하지만 그중 아홉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도 못했다. 떠나보내려면 불러와야 한다. 오백 일이 되어 간다. 그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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