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판 ‘뒷광대’ 한평생 행복했노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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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무대미술가 이병복 씨 구술채록…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출간

최근 삶의 여정을 담은 구술집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를 펴낸 이병복 씨.1960년대 국내 1호 무대 미술·의상가로 등장한 그는 “평생 연극계의 ‘뒷광대’로 일하는 시간이 늘 행복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최근 삶의 여정을 담은 구술집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를 펴낸 이병복 씨.1960년대 국내 1호 무대 미술·의상가로 등장한 그는 “평생 연극계의 ‘뒷광대’로 일하는 시간이 늘 행복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청현문화재단 제공
청현문화재단 제공
“나는 연극판에서 평생 무대 뒷일을 도맡아 하는 ‘뒷광대’였습니다.”

한국 연극계에 무대미술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1960년대 국내 1호 무대미술·의상가로 등장한 이병복 씨(88·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이후 40년간 극단 ‘자유’를 이끌며 무대미술을 정립했던 그가 구술한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가 세상에 나왔다.

‘우리가…’는 청현문화재단의 ‘여성 생애사 구술채록 총서’의 첫 책이다. 1년 동안 17차례 29시간 40분에 걸쳐 구술을 채록했다. 경북 영천 만석꾼 집안 10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연극인으로, 한 가정의 아내로 살아온 이 씨의 생애를 담았다.

25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4길 카페 성수에서 열린 ‘우리가…’ 출판간담회에는 최치림 전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 이병훈 연출가, 배우 남궁원 오현경 강부자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 연극계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다.

1966년 4월 연출가 김정옥과 의기투합해 극단 자유를 창단한 이 씨는 100여 편의 연극을 제작했다. 1968년 서울 명동에 국내 최초의 소극장 ‘까페 떼아뜨르’를 개관해 소극장 운동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극단 자유의 첫 작품인 ‘따라지의 향연’(1966년)을 시작으로 ‘왕자 호동’ ‘노을을 나르는 새들’ ‘햄릿’ ‘어디서 무엇이 돼 다시 만나랴’ 등 작품의 무대와 의상을 도맡았고 무대미술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개척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무대미술계의 대모’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구순을 코앞에 둔 노장이지만 이 씨는 이날 ‘아직도 무대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그저 연극판에서 자투리 시간도 남기지 않고 일하는 게 행복했다”며 “내겐 공포스러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속절없이 밀려나 이젠 (연극계의) 폐기물이 됐다. 좀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더 멋진 무대미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극단 자유의 단원으로 활동한 배우 박정자는 “선생은 무대를 빛내는 뒷광대를 본인의 운명으로 여기신 분”이라며 “워낙 무대에 대한 애정이 커서 가끔 무대에 서는 배우들을 질투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관여한 100여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무엇일까. 그는 “다 애착이 가지만 재공연하고 싶은 작품은 ‘피의 결혼’ ‘노을을 나르는 새들’ ‘환도와 리스’를 꼽고 싶다”고 말했다.

“‘노을을 나르는 새들’에선 배가 불룩한 장독을 본뜬 모양의 독특한 한복 바지를 선보였는데 당시에는 파격적인 의상이었죠. ‘환도와 리스’는 제가 무대미술가의 길을 걷게 해준 작품이라 애착이 커요.”

이 씨는 늘 배우들의 의상을 미리 제작해 공연 전 연습할 때 입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드시 공연 일주일 전 미리 완성된 무대의상을 입고 배우들이 연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원칙이었다”며 “의상도 나름의 영혼을 품은 한 명의 연기자이기 때문에 무대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뒷광대#무대미술가#이병복#구술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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