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진 감독은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뭐냐고 묻자 “블랙코미디 요소가 있는 스릴러나 저예산으로 시도할 수 있는 진짜 리얼리즘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며 자신의 구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어제 잡지사 화보 촬영을 했는데 토끼 귀 머리띠에 나비넥타이를 했어요. 하마터면 웃옷도 벗을 뻔했다니까요.”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만난 안국진 감독(35)은 연이은 영화 홍보 일정에 조금 얼떨떨해 보였다. 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총 제작비 2억여 원의 저예산 독립영화. 하지만 13일 개봉 이후 관객 3만6000여 명을 기록하고 있다. 스크린 수가 가장 많을 때도 70개가 안되는 상황에서 일군 성과다. ‘성실한…’은 손재주 하나로 평생 ‘알바 인생’을 살던 수남(이정현)이 동네 사람들과 재개발로 갈등을 겪은 끝에 자신의 손재주로 그들을 ‘처리’한다는 줄거리다. 》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들었다.
“출연자들은 졸면서도 손을 움직이고 식사할 때도 뛰어서 다녀올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프로는 그런 출연자들처럼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분들의 꿈을 물어보면 ‘집 한 채 사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거다. 뭔가 모순이라고 느꼈다.” ―영화에선 수남이 ‘알바’ 끝에 달동네지만 집 한 채를 산다. 보통 주인공이 재개발 때문에 셋방에서 쫓겨나는 줄거리를 상상할 텐데 반대다.
“뻔한 전개를 피하고 싶었다. 주인공이 세입자였다면 집을 사고 갈등이 끝났을 거다. 수남은 집주인이 됐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오히려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충돌하는 역설적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 수남이든 동네 주민이든 상대를 이해하려는 조금의 노력도 없이 자기 욕심으로만 상대를 대한다.” ―수남 역을 연기한 이정현이 굉장히 고생했을 것 같다. 납치·감금·고문에 대형 세탁기에 직접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속사에 처음 출연 제의를 했을 때는 거절당했다. 내 시나리오를 좋게 본 박찬욱 감독님이 다시 정현 씨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보내줘서 승낙 받았다. 나로서는 정말 행운이었다. 정현 씨는 시나리오상의 행동뿐만 아니라 이면의 감정이나 동기까지 이해하려 하더라. 3분의 1 정도 찍고 나서는 연기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배우가 이렇게 창조적인 직업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남의 ‘원맨쇼’에 가깝다. 요즘 여자 배우가 영화 전체를 끌고 나가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수남은 굉장히 적극적이다. 장애가 있는 남편까지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약자 중의 약자인 여자가 악조건 속에서 애를 쓰면 그 심정이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다. 수남의 캐릭터를 만들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다. 굉장히 활동적이고, 잠시도 일을 쉬지 못하신다. 과연 어머니의 의지와 생활력이라면 수남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상상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수남은 때로는 소녀 같지만 때로는 굉장히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한다.
“시사회에서 40대 이상 아주머니들이 재미있게 보시더라. 수남의 남편이 장애를 갖는 장면에서는 탄식하기도 하고, 수남이 세탁기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도 20, 30대는 무서워하는데 그분들은 눈물을 흘리더라. 평생 일하며 바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느끼는 거다. 공감이 된다, 위로가 된다는 말씀을 많이 해준다. 그 나이대의 분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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