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오의 우리 신화이야기]당금애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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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제석 무신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삼불제석 무신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옛날 조선 땅에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벼슬도 벼슬이지만 아들을 아홉이나 두어 뭐 하나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딸 하나만 더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정성이 부족해 그런 것이니 명산대천에 백일기도를 드려봅시다.” “그렇게 하시오.” 하루 가고 이틀 가고 열흘 가고 한 달 두 달 석 달 열흘. 백일기도를 마치자 그날부터 태기가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열 달 후 부인은 천상 선녀가 하강한 것 같은 예쁜 딸, 당금애기를 낳았다.

한번 흉하면 한번 길하고 한번 길하면 한번 흉하는 법. 때마침 한 간신이 당금애기 부친과 아홉 오라버니를 모함하였다. 억울하게 아홉 아들과 귀양을 가게 된 당금애기 부친. 발걸음을 떼자니 딸이 못내 눈에 밟혔다. 한 발짝 떼고 눈물, 두 발짝 떼고 한숨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떼고 보니 집은 점점 멀어지고 갈 길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구나. 한 사람 앞에 백일씩 삼 년 작정으로 기도 드리러 갈 터이니 너는 아무쪼록 집을 잘 지키고 있어라.” 당금애기는 졸지에 부모를 생이별하고 너르디너른 집에 하녀 둘과 남게 되었다. “우리 절의 부처님은 앉아서 삼천 리 서서 구만 리를 내다보십니다. 시주하시면 귀양 가신 부친이 속히 풀려나실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시주를 청하면서 말했다. 당금애기는 스님의 말에 귀가 번쩍 띄어 쌀을 가져다 바랑에 부었다. ‘부정(不淨)이야, 부정이로구나.’ 웬일인지 스님의 바랑에는 쌀이 하나도 담기지 않고 땅으로 몽땅 쏟아졌다. “광대싸리 젓가락으로 주워 담아야 부친께 지극정성이 될 것입니다.” 부친 말만 나오면 눈은 캄캄 가슴은 답답, 당금애기는 하는 수 없이 한 톨 한 톨 쌀을 주워 담았다.

어느새 해는 지고 달이 솟았다. “바삐 가오.” “문간이라도 빌려 주면 새고 가든 자고 가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스님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문간에서 마당을, 마당에서 마루를, 마루에서 당금애기가 자는 방을 차츰 요구하였다. “한 방 쓰자는 말이 웬 말이냐? 바삐 가라.” “방 가운데에 병풍 치고 반쪽을 나에게 주면 내외 체통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당금애기가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듯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스님의 도술인지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당금애기는 선녀로부터 구슬 세 개를 받는 꿈을 꾸고 세쌍둥이를 잉태했다. “어째서 몸이 깍짓동만 한 것이냐?” 귀양에서 풀려난 당금애기 부친은 딸이 임신한 것을 알고서는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다. “사람으로서 어찌 자기 자식을 죽인단 말입니까?” “굶어서도 죽을 것이요, 얼어서도 죽을 것이요, 토굴 속에다 가둬라.” 기막힌 당금애기, 처량한 당금애기의 신세였다.

당금애기는 어머니가 몰래 가져다준 음식으로 목숨 보전하며 세쌍둥이를 낳아 씩씩하게 키워냈다. “친구들이 이름도 아비도 없는 놈들이라고 놀립니다.” 일곱 살 세쌍둥이가 하소연했다. “아버지를 찾아가자꾸나.” 당금애기는 스님을 찾아가 세쌍둥이의 이름부터 지었다. 형불이, 재불이, 삼불이. 세쌍둥이는 팔십 년을 살다 한날한시에 죽었다. 그 후 이들은 개인의 운수 재수(財數)는 물론이고 나라의 평화까지 이뤄주는 삼불제석신(三佛帝釋神)으로 모셔졌다. ‘당금애기’ 신화는 가족과의 단절, 격리로 인한 결핍과 그 극복 과정의 ‘힘’을 잘 보여준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가시적 단절을 바꿀 순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바꿀 수 있는 힘을.

최원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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