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체를 알기 힘든 신기한 존재들로 넘쳐난다. 얼마 전 멀티플렉스극장 팝콘매장에서 맞닥뜨린 ‘헛개수 콤보’의 정확한 정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기존 세트메뉴에 비해 칼로리가 현저히 낮음을 내세우는 이 녀석은 탄산음료 대신 헛개수 음료를 결합한 이종교배. 아, 트랜스지방이 든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몸에 좋다는 헛개수 음료를 마시는 순간 밀려오는, 뭔가 구원 받는 듯한 이 느낌의 정체란 과연 무엇인가 말이다. 이 녀석은 도대체 몸에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존재들은 최근 개봉된 영화들에도 속속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뇌쇄적인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와 2년 전 이혼한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이 이혼한 남자로 출연하는 영화 ‘원 와일드 모먼트’. 여기서 그는 ‘아빠’와 ‘수컷’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혼란스러운 인물로 등장한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두 40대 중반 남자가 각자의 딸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여기서 “아빠의 역할은 딸을 보호하는 것”이라며 잘난 척하는 아빠로 등장하는 카셀은 친구의 열일곱 살 된 딸이 “당신은 아빠의 친구가 아니라 내 운명의 남자예요”라며 들이대자 그만 하룻밤을 보낸 뒤 후회막급하게 된다.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나로선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이놈의 남자들은 젊으나 늙으나 그저 섹스 생각밖에 안 한다’는 생각을 여성들이 왜 하는지 살짝 이해도 되는 것이다.
‘아빠의 탈을 쓴 수컷’인 카셀처럼 요즘엔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이 돌아버릴 만큼 많다. 최근 국내에선 “키스하고 싶다”며 며느리를 성추행한 욕망 시아버지가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로 그날 바다 건너 미국에선 ‘불륜 조장 사이트’로 꼽히는 ‘애슐리 매디슨’을 부도덕하다며 맹비난했던 유명 목사가 이 사이트의 회원으로 드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다. 특히 요즘엔 사람의 겉을 보고 그 속을 짐작해선 절대로 안 된다. 멀쩡하게 생기고 매너도 좋던 남자들이 “감히 내게 헤어지자고 해?”라며 식칼 들고 전 여자친구의 부모를 찾아가 협박하거나 인질극을 벌이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다 보니, 요즘 딸 둔 부모들은 ‘명문대 나온 놈, 잘생긴 놈, 돈 많은 놈 다 필요 없다. 남자 놈들은 애당초 사귀질 마라. 내 재산 전부 물려주고 커피전문점 차려줄 테니 평생 연애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게 상책이다. 세상의 모든 수컷은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라고 딸들을 설득하는 일도 다반사인 것이다.
바로 이런 세태 속에서 한효주 주연의 ‘뷰티 인사이드’라는 기발하고 감각적인 최신작이 던지는 메시지는 한층 빛난다. 여기에는 매일 자고 일어나면 외모가 바뀌는 이상한 남자 ‘우진’이 나오는데, 어느 날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한효주는 매일 외모가 바뀌는 이 남자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깊은 마음의 병을 얻는다. 하지만 남자의 변함없는 진심을 읽은 한효주는 변화하는 남자의 외모가 주는 충격과 공포를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숨이 막혀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한효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 영화를 보고 “매일 얼굴이 바뀌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면서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댓글이 달린 것을 여럿 보았는데, 정말 한심한 평가라고 난 생각한다. 아니, 그럼 ‘배트맨’은 왜 비현실적이라고 탓하지 않는가 말이다. 박쥐 옷 입고 지구를 지킨다며 설치는 남자가 현실에선 있겠느냔 말이다.
또 어떤 욕망 아저씨는 이 영화를 보고 “와이프가 딱 저랬으면 좋겠다. 하루는 한효주도 되었다가, 다음 날엔 김태희도 되었다가, 전지현도 되고, 설현(걸그룹 AOA 멤버)도 되고…” 하던데, 그건 영화 속 ‘우진’이 이범수 이현우 이진욱 이동욱 유연석 같은 멋진 남자로 변했을 때만을 보고 아전인수로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 ‘우진’은 뚱뚱한 아저씨로도, 대머리 아저씨로도, 심지어는 아이나 여자나 할머니나 외국인으로도 변하지 않는가 말이다.
어디까지나 이건 은유다. 변하는 외모라는 설정을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은 외모도, 나이도, 성별도, 인종도 아닌 내면의 진정성과 일관성’이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이거늘. 겉은 똑같지만 속은 아빠도 되었다가 수컷도 되었다가 (운전대를 잡으면) 파이터로도 변하는, 트랜스포머형 내면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는 오히려 겉은 달라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인간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도가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바뀌지 않으려 하는 것 자체가 투쟁인 시대를 우리는 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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