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8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서독 대사관에는 동독 난민 400여 명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동구권을 휩쓴 개방의 물결 속에서 서방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넘어가지 못하고 헝가리에서 발이 묶인 것입니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BFO)의 상임지휘자 피셰르 이반(사진)이 이 난민들을 BFO 콘서트에 초대했습니다. 독일 작곡가인 베토벤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당초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였습니다. “우리는 발코니석 표를 파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난민들을 초대하자고 했습니다. 그 나라의 작곡가 베토벤의 곡으로 꾸민 연주회니까요. 서독의 외교관이 내 방으로 와서는 ‘난민들에게 내일 일을 말해주는 게 얼마나 멋진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8월 18일이었습니다.
음악회가 끝나고 나서 난민들은 다음 날 오스트리아와 접한 국경으로 소풍을 가기로 했습니다. 19일 이들이 국경 옆에 도달하자 헝가리 정부는 담을 열었고 동독 난민들은 오스트리아로 넘어갔습니다. BBC 라디오의 음악평론가 톰 서비스가 쓴 책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장호연 옮김·아트북스)에 나온 얘기입니다. 서방으로 가는 국경이 열리자 동독 정부도 11월에 여행 자유화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음악이 간접적으로나마 역사 발전에 기여한 사례입니다.
사반세기가 지나 이달 5일, 피셰르는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BFO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연주 시작 전, 그는 마이크를 잡고 헝가리가 중동 난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을 철폐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객석에는 그가 초청한 시리아 난민들도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따뜻한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이날 콘서트가 열리기 전 난민을 태운 헝가리 버스가 처음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한 일이지만 앞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난민을 계속 조건 없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라고 합니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에서 실러의 시를 인용해 “관습이 엄중히 갈라놓았던 것을 기쁨의 마법이 한데 묶어, 온 인류는 하나가 되노라”라고 노래했습니다. 베토벤과 실러의 숭고한 이상이, 베토벤과 실러의 나라인 독일과 베토벤의 활동무대였던 오스트리아에서 실현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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