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저서 ‘섬’(1959년)에서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 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썼다. 그의 글은 사진작가들이 흔히 얘기하는 ‘가장 좋은 빛이 공기 중에 머무는 찰나’의 해석으로 쓸 수 있다. 석양이 기울어 모든 빛이 온전히 사라지기 직전 또는 해 뜨기 직전의 짤막한 푸른 빛. 지구는 하루 중 가장 격정적인 모습을 그 두 번의 잠시 동안 인간의 눈에 허락한다.
11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서울에서 개인전 ‘어스름’을 여는 화가 공성훈 씨(50)는 그 어슴푸레한 긴장의 시간 토막을 줄기차게 화폭에 붙들어 왔다. 그의 그림은 종일 비틀거리며 달려온 육신이 달콤한 밤의 품으로 뛰어들 욕망에 벅차오른 찰나, 또는 긴 어둠을 견딘 이성이 비로소 새 빛을 맞이할 기대의 두근거림을 애써 가누는 순간의 기록이다.
“작업실에 들일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캔버스를 사용한다”는 공 씨의 작품은 대개 높이 2m를 훌쩍 넘긴다. 확보할 수 있는 최대 면적에 그가 채워 넣는 것은 이 땅 곳곳의 바다, 하늘, 바위, 나무다. 이번에 선보인 16점이 대상을 포착한 방식은 딱히 특출하다고 하기 어렵다. 야박하게 본다면 평범하다 못해 상투적이라고 여겨질 구성도 몇몇 있다. 그럼에도 편안하게 압도한다. 튼튼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댄 듯한 편안함이다.
신작 ‘버드나무’나 2013년 작 ‘흐린 하늘’에는 아예 구성이랄 게 없다. 새벽녘 나무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문득 알아챈 나뭇가지의 선뜻한 어스름 이미지를 그냥 통째로 베어낸 듯 담았다. 캔버스 3개를 가로로 연결한 이미지가 보는 이의 시선을 와락 삼켜버린다. ‘흐린 하늘’은 제목 그대로 옅은 구름이 곱게 흩뿌려진 어스름 하늘 모습이다. 한참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젖힌 얼굴 위로 부슬부슬 안개비가 닿을 듯한 촉촉함이 스며온다.
공 씨는 여러 곳을 다니며 찍은 사진을 보고 작업한다. 하지만 어스름 사진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컴퓨터로 사진의 빛과 색을 가공하지도 않는다. 수백 장 중 한 장, 그려야겠다는 작정이 생기면 어떤 시간을 촬영한 것이건 자신의 의지와 표현을 통해 ‘어스름의 이미지’로 바꿔 그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듯 사실이 아니다. 소금기가 울컥 넘어올 듯 캔버스 속 파도가 넘실대지만 물결 묘사가 세세하기 때문은 아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과학기술대에서 전자공학으로 외도했다가 다시 서울대 미대 대학원으로 돌아온 공 씨의 묘한 이력은 보는 이의 반응을 예상해 분석하듯 조직한 이미지에 은근히 스며 있다. 그는 “회화의 힘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은 관람객의 마음을 압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은 대개 회화 하면 그저 예쁘거나 보기 편하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회화는 작업 과정이 길고 복잡하다. 작가는 각 단계마다 수많은 결정을 거듭해야 한다. 머릿속 생각과 몸의 행위가 맞물려 이뤄낸 그 결정의 방향에 따라, 순간순간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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