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아버지의 첫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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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딸에게 한다는 것이 좀 뭣하다만….”

유교정신이 몸에 밴 보수적인 파평 윤씨 친정아버지가 당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셨다. 오늘은 우리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들어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서둘러 귀가한 날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더 노쇠해진 97세 아버지에게 별반 해드릴 게 없다.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지도 못하고 새 옷도 원치 않으신다. 환자로 누워서 지내지 않고 정신이 맑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도 좋은 구경도 맛있는 음식도 다 소용이 없다는 게 쓸쓸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진짜 효도할 한 가지 방법은 남아 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드리는 일이다. 솔직히, 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세대 차이로 인한 대화의 한계뿐 아니라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손들이 체면상 듣는 시늉을 할 뿐, 눈은 스마트폰에 가 있고 기회만 있으면 엉덩이를 들려는 속내가 뻔히 보인다.

5년 전쯤 가을이었다. 광주에 사시는 강 선생님이 “가을을 탄다”며 나랑 포도주 한잔하러 상경한다는 전화를 하셨다. 카리스마 넘치는 70대 선생님은 ‘늙는 게 쓸쓸하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전에는 아들들을 앉혀놓고 한 말씀 하시면 경청하는 자세가 역력했는데 지금은 “말씀하세요. 들어는 드릴게요”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날 바바리코트에 긴 머플러로 멋을 낸 선생님의 여전히 형형한 눈빛을 보며, 부모의 말을 열심히 들어드리는 것이야말로 큰 효도라는 것을 알았다.

백세를 바라보는 나의 아버지도 가을을 타시는 걸까. 아님 모처럼 딸과 호젓하게 앉아 두세 시간 당신의 삶을 이야기하시다 보니 신이 나신 걸까. 엄마와 중매로 만나 결혼하기 전 스무 살 무렵에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첫사랑 여인이 폐결핵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발설(?)하셨다. 이루어지지 못한 아버지의 첫사랑에 속없이 안타까워하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순간, 청년 같은 생기가 돌았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한때 눈부신 스무 살 청년이 아니었던 노인이 어디 있으랴. 어느새 많이 늙어버린 아버지와 마주 앉아 오랜 세월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드리다 보면 혹시 아버지의 청춘과 조우할지 모른다. 늦기 전에 청년 아버지와 만나 보자. 아버지의 노안에서 환한 미소를 보게 될 것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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