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3년 10월 고려 충혜왕은 원(元)의 사신에게 납치되다시피 원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로 끌려간다. 한 달 뒤 대도에 도착한 충혜왕은 원나라 황제로부터 게양 현(중국 남부 광둥 성)으로 유배 조치를 당한다. 충혜왕은 유배 가던 중 악양 현(후난 성)에서 숨졌다.
국내에서도 충혜왕이 음행을 많이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한 나라의 군주를 마음대로 잡아다가 유배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과 고려의 관계가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뒤에는 원의 후궁으로 선발돼 들어갔다가 황제의 정부인이 된 기황후의 개인감정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충혜왕이 사소한 다툼으로 기황후의 다섯째 오빠인 기윤의 집을 허물어버리자 기황후가 직접 손을 썼다는 것.
이 책은 1300년대 초중반 이른바 원 간섭기에 기황후처럼 원나라와의 끈을 배경으로 고려 정치에 관여한 ‘부원배(附元輩)’를 주목한다. 고려와 원의 관계는 충렬왕이 원 공주와 결혼해 ‘부마국’의 위치를 갖게 되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충선왕은 주로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무종과 인종 등 두 황제를 옹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덕에 고려의 왕이면서 원 제국 2인자의 지위를 누렸다. 양국의 관계는 비정상적으로 가까워졌고 원을 왕래하는 국왕을 시종하던 환관 통역관 내관 무관 등 관리들이 부원배가 됐고 이들은 전통적 지배층인 문벌귀족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고려 문벌귀족 시각에서 보면 부원배는 원에 빌붙어 권력을 탐한 자들이지만 세계 제국의 시각에선 원나라의 세계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주역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선조 역시 몽골에 귀화했던 무장들이었다. 제목처럼 이 시기는 고려 왕조의 위기임과 동시에 세계화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이중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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