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셰프 김성규의 푸드카]요리, 처음 본 이도 친하게 만드는 마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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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도리탕
김성규 셰프
김성규 셰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평생 해 본 음식이라곤 라면 정도밖에 없는, 자생력 제로의 인간이었다. 그러다 요리학교에 들어갔고 그 과정이 거의 끝나가던 지난해 여름, 어떤 음식도 레시피만 있으면 최소한 먹을 수 있게 조리할 수 있는 기술 보유자가 됐다. 실로 환골탈태의 변신이다. 요리할 수 있다는 건, 인생이 펼쳐 보이는 숱한 가능성에 새로운 문 하나를 활짝 여는 것과 같다. 지난해 7월 혼자 떠난 호주 여행은 내 인생의 여행으로 꼽을 만했는데 이는 요리 때문이다.

여행의 첫 숙박지는 호주의 문화 수도인 멜버른에서 서쪽으로 290km 떨어진 인구 5000명 남짓의 어촌 포트페어리였다. 이곳에서 숙박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아름다운 해안 도로로 손꼽히는 그레이트오션로드를 차로 달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작은 마을은 이 도로가 끝나는 부근에 있다. 나는 멜버른 공항에서 차를 빌려 하루 종일 이 길을 신나게 달린 뒤 숙박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를 통해 미리 예약한 포트페어리의 한 가정집에 도착했다. 마당 있는 목조 단층 주택엔 장성한 아들 둘을 출가시키고 단기 여행객에게 숙소를 제공해 생활비를 버는 60대 초반의 여성 트리시가 혼자 살고 있었다.

이제 요리가 어떻게 낯선 현지인과의 교감에 영향을 미치는지 테스트해 볼 차례. 다음 날 아침 트리시와 차를 마시다가 불쑥 “오늘 저녁 내가 요리할 테니 함께할 수 있는 지인들도 초대하라”고 깜짝 제안했다. 트리시는 반색하며 “이왕 할 거면 한국 음식을 해 달라”고 주문하고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느라 법석을 떨었다.

사실 트리시는 태어나서 호주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시골 아주머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 이 마을에 동양 음식점이라고는 ‘쿵푸 레스토랑’이라는 유치한 이름의 중국음식점이 다였다.

그러니 내가 만드는 음식이 트리시가 맛볼 한국 음식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터였다. 고민 끝에 정한 메뉴는 ‘닭도리탕’이다. 용어에 대한 논란은 음식문화 평론가 윤덕노 씨가 2011년 11월에 동아일보에 쓴 글을 참고하시라.

닭도리탕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자주 식탁에 내신 추억 많은 음식이다. 나로선 그때가 이 음식을 만든 첫 시도이긴 했지만 인터넷으로 찾아본 조리법은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생닭을 토막 내 매운 양념장을 푼 육수에 감자 양파와 함께 넣어 약한 불로 졸이듯 자작자작하게 익히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 동네에서는 선명하게 붉은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구할 수 없다는 것.

색깔이 그리 붉지 않은 ‘칠리파우더’를 쓰는 대신 껍질 벗긴 토마토를 함께 넣어 걸쭉하게 끓이기로 했다. 실제로 해보니 토마토를 섞은 것이 효과만점이었다. 색깔도 보기 좋은 붉은빛이었고 고추의 칼칼한 매운맛을 신맛 섞인 둥글둥글한 매운맛으로 바꿔놓아 대놓고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의 입맛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이날 초대받은 트리시의 친구는 낮에 팔이 부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뒤 깁스를 한 상태로 찾아주었다. 이렇게 세 명이 한 솥 끓인 닭도리탕을 바닥까지 긁어 깨끗이 비웠다. 밥을 짓고 난 뒤 바닥에 밥이 눌어붙은 무쇠냄비에는 물을 끓여 누룽지 숭늉을 만들었는데 트리시의 친구는 ‘라이스 수프’라며 신기해했다.

이날 내가 만든 닭도리탕이 정통 한국 음식이 아니라고 트집 잡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의 프레임을 길게 늘여 보면 퓨전 아닌 음식이란 별로 없는 법이다. 이날 음식도 한국인에겐 토마토가 들어간 퓨전 닭도리탕이고, 서양인에겐 마늘과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퓨전 닭고기 스튜이니 말이다.

내가 요리를 할 수 없었다면 포트페어리의 여행은 평범한 관광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요리 덕분에 와인을 홀짝이며 늦은 시간까지 호주 여성들과 양국의 문화와 각자의 삶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트리시는 나의 에어비앤비 계정 게시판에 ‘나와 내 친구를 위해 맛있는 한국 음식을 해 준 성규가 다시 포트페어리를 찾아주길 희망한다’는 글을 남겼다. <끝>

※필자(44)는 싱가포르 요리학교 샤텍 유학 뒤 그곳 리츠칼턴호텔에서 일했다. 그전 14년간 동아일보 기자였다. 경기 남양주에서 푸드카 ‘쏠트앤페퍼’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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