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되도록이면 극장에서 보려 하지만 극장에 갈 시간이 없거나 이미 때를 놓친 영화를 볼 때면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해서 본다. 가끔은 그 과정이 지하철을 타고 극장에 도착하는 일보다 수고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6년이 다 돼가는 컴퓨터가 결제에 필요한 프로그램 앞에서 맥없이 자꾸 튕겨 나가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 넘게 낑낑대다 겨우 영화를 다운로드해 본 적도 있다. 혹시 이런 이유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쉽게 불법 다운로드하는 것이 영화를 보는, 더 대중적인 방법이 된 건 아닐는지.
간혹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으레 “어디서 봤어?”와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집에서 봤다는 말에는 보통 ‘대중적인 그 방법’, 즉 ‘어둠의 경로’를 먼저 떠올린다. 알게 모르게 ‘집=어둠의 경로’라는 공식이 형성돼 있는 분위기다. 정식으로 결제를 하고 봤다고 하면 어쩐지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뭐가 더 당연한 걸까?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옷가게에서는 옷값을 지불한다. 누구도 가격이 붙어있는 상품을 그냥 집어가려 하지 않는다. 행여 ‘제 돈을 주고 가져가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일 아니겠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진다면 그 많은 카페와 옷가게들은 순식간에 모두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것 역시 그에 맞는 정당한 대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지당한 일일 테다.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 역시 마냥 떳떳하지는 않다. 내 이익만 생각하며 쉽게 이기적인 방법을 선택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다.
대학 시절, 휴학을 하고 영화 만드는 일을 경험했다. 한 편의 상업 장편 영화와 크고 작은 몇 편의 독립 단편 영화에 참여했다. 직접 현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영화를 만드는 세계에 대한 멋진 그림을 상상하며 막연한 환상을 부풀렸다. 하나 실제는 상상과 달랐다. 예술가의 고뇌보다는 각 분야의 스태프들이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노동의 현장에 가까웠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냐만 노동 강도에 비해 보상은 모자라게만 느껴져 동료들과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별다른 제작 지원이 없는 단편 영화 현장에서는 제작비에 의해 여러 결정이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 안에서 더 나은 선택들을 왕왕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예산의 대부분은 연출자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1년여 시간 영화 현장을 기웃거렸다. 누군가에게는 몇 기가바이트에 불과한 파일이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제작비를 포함한 여러 자원을 투입해 완성된 결과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아무리 작은 영화라도 정식적인 방법을 통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화면 밖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에만 국한해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과 만화 등의 콘텐츠를 즐기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단순히 몇 메가, 몇 분, 몇 장, 몇 컷짜리가 아니다. 그것이 내 앞에 나타나기까지 들였을 많은 자원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정당한 방법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리고 콘텐츠 수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는 저작권자와 스태프들에게 합당한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
지난 시절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본다.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최신작이 나온 지 몇 주가 지나 드디어 차례가 돼야 비디오테이프를 빌릴 수 있었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신보 소식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레코드 숍으로 달려가 CD를 샀다. 이제는 극장에서 개봉 중인 영화를 집에서 동시에 볼 수도 있고, 음악을 들으려 인터넷에 접속하면 뭘 들을까, 쉽게 결정을 못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으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편하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콘텐츠를 소비하는 우리의 인식은 얼마나 더 발전했을까. 제값을 지불하는 데 오히려 더 인색해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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