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펴내는 장편이다. 이시구로는 ‘남아있는 나날’로 영미권의 주요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한 작가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5세 때 영국으로 이주해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해온 소설가다.
신작은 흥미롭게도 판타지 소설이다. 배경은 색슨족과 브리튼족이 전쟁을 벌이고 망각의 안개가 뒤덮은 뒤의 평원이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잊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소설은 브리튼족의 노부부인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기억을 찾기 위한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옛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현재의 깊은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기 어렵다. 표면적으로는 어딘가 있을 아들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여행은 기억과 사랑의 연원을 찾기 위한 것이다. 판타지 소설답게 주인공들은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의식, 바구니를 배 삼아 강을 떠내려가는 여정 등 다양한 모험을 겪게 된다.
현실에 배경을 둔 앞선 이시구로의 소설들과 달리 ‘파묻힌 거인’은 도깨비와 기사가 나오는 판타지물이지만 작가의 집요한 주제의식은 그대로다. ‘남아있는 나날’ ‘창백한 언덕풍경’ 등과 마찬가지로 그는 기억에 대해 고민하면서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잊었던 깊은 상처와 만나게 되는 액슬과 비어트리스를 통해 작가는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현재의 안위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묻어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시구로는 미국 방송 NPR와의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 해체, 르완다 대학살 같은 사건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개인의 상처와 망각에 대한 이야기이자 국가가 겪은 분쟁과 침략 같은, 역사의 상처에 대한 성찰로도 읽힐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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