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숲 길’]
‘바둑 황제’ 조훈현 국수, 강원도 대관령 국민의 숲 트레킹
1970∼90년대 국내외 바둑계를 평정했던 ‘바둑 황제’ 조훈현 9단. 바둑판 위에서 빠른 판단으로 상대의 허를 찌를 뿐만 아니라 인내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온 그는 한국 바둑의 상징이자 역사였다. 그는 1975년부터 1985년까지 국수전을 11연패했다. 국수(國手)란 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바둑 실력뿐만 아니라 바둑에 대한 명인 의식과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어야 진정한 국수로 인정받는다. 조 9단에게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국수’라는 호칭이 따라다닌다.
환갑이 지난 62세의 나이, 그렇지만 또렷하고도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턱 선은 그대로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자니 늘 왼쪽 상의 주머니에 꽂혀 있던 담배가 사라졌고, 세월을 막을 수 없어 머리카락이 희끗해진 것뿐이다. 그는 1995년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다. 술은 체질적으로 잘 마시지 못한다.
하얀 머리카락은 겨울철 눈 덮인 산마루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달 22일 조 국수와 함께 대관령 국민의 숲길을 찾았다. 다양한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두 시간가량 걸었다.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서 푸른 숲은 조 국수를 품었다. 그는 최고의 숲 경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 등산, 홀로 헤쳐가는 바둑의 길과 비슷
“걷는다는 게 묘해요. 한 시간을 걸어도 괜찮은가 하면 5분만 걸어도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 명이 아니라 혼자 걸으면 내가 생각한 대로, 내 컨디션에 맞춰 갈 수 있잖아요. 나 홀로 헤쳐 가는 바둑의 길과 비슷해서 산에서 혼자 걷는 걸 좋아해요.”
국민의 숲 진입 직전 집결 장소인 대관령휴게소에서부터 조 국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산길을 꽤 많이 걸어 본 걸음걸이다. 시원스럽게 다리를 펴고 걷는다. 속보(速步)다. 조 국수는 빠르게 대국의 판세를 파악하고 쉴 새 없이 수를 둔다고 해 ‘제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걸음도 딱 ‘산제비’다. 흑돌과 백돌이 생존경쟁을 하는 반상(盤上)을 유유히 헤쳐 나가는 모양새다.
새롭게 리모델링한 대관령휴게소를 벗어나 양떼목장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서면 딱 맞을 너비의 길 양쪽에 울창하게 솟은 전나무가 가을 햇빛을 가려 주기는 하지만 땀이 맺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조 국수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자니 땀 식을 여유가 없었다.
조 국수에게 등산과 산길을 걷는 건 직업의 일부라고 했다. 그에게 산은 바둑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다.
“예전에는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종로4가에서 도봉산으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죠. 1년에 50번 이상은 찾았어요. 산에서 상쾌하게 걷고 다음 날 경기가 있으면 꼭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바둑판에서 있었던 일을 잊기도 하고 또 끄집어내기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위안을 많이 받았죠.”
국민의 숲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길과 주변을 인위적으로 정리해 놓은 건 아니다. 야생화들이 양떼목장으로 향하는 길 주변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그 모습이 늦가을, 겨울이 올 것을 두려워해 마지막 배수의 진을 친 듯했다. 숲에 들어설 때보다는 길이 거칠고 경치는 더 화려해지자 조 국수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보폭을 조절하는 것에서 그의 바둑 철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 국수는 “산행 시간도 길에 따라 다르듯 바둑도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수많은 대국을 치르면서 상대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진리를 얻었고 그것을 산에서 재차 확인했다고 했다.
“한 수만 틀려도 경기를 그르치는 게 바둑이죠. 상대가 평화롭게 수를 놓는 스타일인지, ‘전투’를 좋아하는 건지 먼저 알고 대응해야죠. 상대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내가 따라가면 안 되잖아요. 바둑을 두면서 내 스타일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황이 안 좋으니 이 길로 가자’라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죠. 산이 준 지혜입니다.”
○ 나의 라이벌은 자신
양떼목장 옆길을 따라가다 국사성황당 방향을 향해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코스로 진입하니 암벽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 소리가 걸음을 다시 묶어 둔다. 가을이라 물이 제법 찼지만 손과 발을 못 담글 정도는 아니었다. 조 국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그는 대국에서 표정이 잘 드러나는 ‘인상파’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는 스스로 급이 낮은 ‘하수’라고 자처했다.
“도박의 고수들은 내 패를 안 보고 상대 패를 본다고 하잖아요. 하수들은 좋은 패가 들어오면 입이 찢어지니 얼굴 표정에 다 드러나잖아요. 저도 바둑이 잘되면 콧노래도 흥얼거리고 안되면 망했다고 소리를 지르니 고수는 아니죠. 그런데 (이)창호 9단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얼굴에 안 나타나요. 하하.”
계곡을 지나면 자작나무 등이 무성한 길이 열린다. 나무들이 뿜어 내는 맑은 공기를 두 팔 벌리고 들이마시다 보면 곧바로 대관령 언저리를 볼 수 있는 능선과 마주친다. 조 국수는 산에서도 능선을 좋아한다. 능선에 있으면 가야 할 길을 볼 수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둑에서도 그는 돌아보기를 즐긴다고 했다. 지고 이기고의 문제를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경쟁력이다.
그는 “대국이 끝나면 ‘복기’를 하는데 나의 수를 되돌아보고 한 수 고쳐 놓을 수도 있다. 복기를 하다 ‘이 수가 참 좋네’, ‘이 길은 안 가길 잘했구나’ 하는 보람까지 느낀다”고 말했다.
조 국수는 자기 자신을 유일한 라이벌이자 걸림돌로 본다. 자신을 계속 이겨 내지 못하면 그야말로 직무 유기라고 생각한다. 흔히 언론 등에서 부추기는 라이벌 관계는 2인자를 1인자에게 붙이기 위한 과대 포장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산을 등반하는 사람을 위대하게 평가하는 건 얼마나 빨리 정상에 올라갔는지 시간을 따져서가 아니죠. 힘든 상황과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가 얼마나 이겨 내고 산과 마주쳐 목표를 달성했느냐에 따라 박수를 보내는 거죠. 바둑도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정한 목표를 악착같이 이루어야 상대와 싸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고 봅니다.”
○ 진정한 바둑 깨닫게 해 준 제자 이창호
‘조훈현’ 하면 따라다니는 이름이 천재 기사 이창호 9단(40)이다. 조 국수가 키운 제자다. 조 국수는 이제 어딜 가든 그와 한 몸임을 느낀다고 했다. 이 9단은 어린 시절 조 국수의 제자가 된 후 이미 불혹의 나이에 통산 1700승을 넘겼다(조 국수는 1909승). 스승의 업적을 지금이라도 넘을 기세다. 이 9단은 조 국수에게 운명이나 다름없다.
“처음 본 창호는 매일 노는데 시험에서 100점을 맞는, 흔히 말하는 식의 천재는 아니었죠. 그런데 창호는 남들에게 없는 부동심이나 평정심을 갖고 있었어요.”
아무리 제자라고 해도 이창호를 보며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바둑의 신세계를 열어 준 것도 제자였다.
“아슬아슬하게 경기를 끝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 ‘플러스알파’라는 무기를 찾아내 완벽하게 끝내는 능력이 있어요. 정말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데 창호는 그걸 해내는 겁니다. 이건 흔히 보이는 천재형은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눈에 안 보이는 천재라고 할까요.”
조 국수는 평소 길을 걸으면서 되도록 아스팔트가 깔린 길은 피해 왔다고 했다. 딱딱한 감촉이 싫어서였다. 코스 막바지의 땅은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어 마치 스펀지를 밟는 듯 가볍고 촉촉했다. 조 국수는 이 길처럼 이 9단과의 만남 이후 바둑 인생길에도 부드러움이 더해졌다고 했다.
네 살 때 바둑을 처음 시작한 조 국수는 1963년 열 살의 나이에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부친은 아들을 기사로 키우기 위해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10년간의 유학 생활 동안 2명의 스승 밑에서 바둑을 배웠다. 이후 조 국수는 한국에 들어와 바둑계를 평정했다. 1980년에는 9관왕, 1982년에는 10관왕, 1986년에는 11관왕 등 3차례에 걸쳐 국내 기전의 전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 국수는 이 9단을 제자로 가르치면서 그 뒤에야 일본에서 배운 바둑의 의미를 알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바둑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 와서 실력이 늘었던 건 아니었어요. 스승 2명에게 솔직히 어떤 바둑 기술을 배웠느냐고 물으면 생각이 잘 안 날 정도예요. 그런데 세고에 겐사쿠라는 스승이 ‘최고수가 되기 전에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했던 말씀의 의미를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느낍니다. 바둑 기사는 인간의 도리를 갖추는 게 우선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항상 겸손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인정해야 상대의 수도 보입니다.
스승님은 ‘1+1은 2다’라는 걸 가르쳐 주기 전에 제자의 바른 인생을 위해 울타리가 먼저 돼 주려고 했던 것이죠. 창호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저의 바둑 인생은 일본 유학 시절의 배움이 모두 채워 주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모르게 창호에게도 별다른 걸 가르쳐 준 게 없이 인연이라는 마음으로 대했어요.”
○ 조훈현-이창호를 넘는 절대 강자가 나오기를…
바둑과 연을 맺은 지 58년. 1982년 국내 기사로는 최초로 9단에 오른 지도 33년이 흘렀다. 산림 트레킹 코스를 거쳐 종착지인 대관령휴게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로는 대관령으로 향하는 옛길이다. 그 옆에 시원스레 뚫린 영동고속도로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조 국수는 이 길에서 1989년 한국 기사로는 처음으로 정상을 차지했던 잉창치배와 1994년 후지쓰배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 4대 기전을 모두 석권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잊지 못할 기억을 차례로 떠올렸다.
제자인 이창호가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얼마간 전성기를 누린 한국 바둑이 조용히 존재감을 잃어 간 작금의 상황도 아쉬워하는 얘기를 꺼냈다. 자신을 비롯해 한국 바둑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절대 강자들이 배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미련이 크다. 바둑도 유행을 타는 것이라고 애써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국 바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의지도 크다.
“예전에는 권투로 치면 12라운드 판정까지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다 51 대 49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서로 초반에 KO 펀치를 날려 둘 중 하나가 금방 쓰러지는 경기가 대부분이에요. 게다가 예전에는 공격력은 누가 최고, 수비는 누가 일류라는 식으로 기사마다 특징이 있었는데 그런 경계도 모호하고요. 저나 선배들을 확실하게 뛰어넘는 절대 강자가 나와야 다시 바둑 붐이 일지 않을까요. 저는 이제 부모의 마음으로 스승에게 받은 것들을 물려주는 역할을 할 겁니다. 세계 챔피언, 황제라는 타이틀은 제자들이 가져가야죠. 창호한테 뺏긴다면 더욱 기분이 좋겠지만요. 하하.”
▼용평리조트 인근에 고품격 복합문화공간 ‘더 리지 354’▼
대관령 ‘국민의 숲길’을 걷게 되면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장 부근에 있는 ‘더 리지(The Ridge) 354’(사진) 방문도 추천한다. 용평리조트와 가까운 이곳은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와 엠리밋, 이탈리아 프리미엄 캐주얼 나파피리를 운영하고 있는 MEH(밀레에델바이스홀딩스)가 선보인 신개념 복합 문화 공간이다.
아웃도어 활동에 필요한 각종 활동성 의류와 골프웨어 브랜드 매장도 들어서 있다. 또 레스토랑과 갤러리 등도 있어 일반 매장과는 차별화된 쇼핑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바에서는 국내에서 맛보기 힘든 수제 맥주와 와인을 판매한다. 갤러리 ‘아트 스페이스 354’는 국내외 예술 작품들을 전시하는 데 두 달에 한 번씩 작품을 교체한다. 서울 삼청동에서 갤러리 ‘진선’을 운영하고 있는 허선 대표가 직접 작품을 선별해 격조를 높여 주고 있다. 평창 올림픽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도록 꼭대기 층에 테라스도 열 예정이다. 東亞日報와 밀레가 함께하는 열두 길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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