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벌모(上兵伐謀)! 적의 모략을 분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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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0월 1일 14시 29분


[신동아 10월호/史記에 길을 묻다]
외교는 생존수단이자 불패전략
대한민국 외교가 중대한 전기를 맞았다. 전 세계로 점차 확대해가는 중국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고 ‘영원한 우방’ 미국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계 최강 두 나라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기원전 4세기의 전국시대 형세도.
기원전 4세기의 전국시대 형세도.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약 550년에 걸친 대혼란기였다. 초기 100개가 넘던 나라가 550년 동안 하나로 수렴돼간,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과 전쟁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이는 달리 말해 외교전의 시대이기도 했다. 경쟁과 전쟁에는 반드시 외교가 수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 치’ 혀로 나라 구하다


특히 전국시대(기원전 480∼기원전 222)는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나 서로 대치하며 호시탐탐 상대를 노리는 한층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다.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전쟁 · 연합 · 분열 · 이간 · 포섭, 빈번한 왕복 외교, 무궁한 음모와 계략 등으로 전국시대 특유의 복잡한 정국이 조성됐다. 정세는 갈수록 미묘해졌고, 지혜로운 외교전략은 더욱 절실해졌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무력에만 달린 것이 아니었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정치(외교)로 결정되지 무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조정과 종묘사직의 안위는 전략과 정책에서 결정나지 전쟁터에서 군대가 서로 마주치는 것에서 결정나지 않는다.

무력을 동원하는 것보다는 정치(외교)를 활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외교에서 승리를 거두지, 전쟁에서 승리를 얻진 못한다는 뜻이다. 전략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책략이다. 성 밖에서 벌이는 야전은 수준 낮은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각국의 세력이 흥하고 쇠하는 모순의 틈을 이용하고 확실한 책략으로 외교를 펼친 끝에 위급한 상황을 타개함으로써 마침내 싸우지 않고 승리를 얻은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시 외교(유세) 전문가의 한 사람이던 이사(李斯)는 “지금 바야흐로 대국들이 서로 다투고 있지만, 그 일을 주도하는 자는 유자(游者, 유세가)들”이라고 말했다.

가난하고 ‘그 몰골이 남루하기 짝이 없던’ 소진(蘇秦)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유세”함으로써 당시 6국을 대표하는 공동 재상의 인장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남다른 담력과 지략, 총명한 지혜로 열두 살 나이에 세 치 혀로 국가를 위기에서 여러 차례 구해낸 감라(甘羅)도 있다.

伐謀는 상수, 攻城은 하수


전쟁에서 직접 몸을 던져 싸우는 군사 전문가들도 무력 수단보다 외교가 훨씬 차원 높은 책략이란 사실을 잘 안다. 손무(孫武 · 기원전 545~470)는 외교와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군사 전문가다. 그는 군사학의 바이블 ‘손자병법’에 이렇게 썼다.

최상의 전쟁은 적의 계획(전략, 모략)을 분쇄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적의 외교를 파괴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무기로 정복하는 것이고, 가장 못한 방법은 적의 성곽을 공격하는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부득이한 경우에 쓰는 것이다. -‘모공(謀攻)’편

최상의 병법(上兵)으로 상대의 모략, 즉 전략을 분쇄하는 ‘벌모(伐謀)’를 꼽은 것이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상병벌모(上兵伐謀)’다. 물론 이를 실행에 옮기려면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쥐고 있어야 한다. 일찍이 ‘손자병법’에 대해 최초의 해설서를 남긴 조조(曹操)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상병벌모’를 이렇게 해석했다.

군사를 일으켜 멀고도 깊숙이 들어가 그 성곽을 점거해 내외를 단절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나라를 들어 굴복게 하는 것이 최상이다.

조조는 강력한 군사적 역량을 기반으로 하되, 여기에 ‘벌병(伐兵)’과 ‘공성(攻城)’을 배합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승리를 낚아 적 전체를 항복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봤다. 이는 상대의 철저한 소멸을 위한 군사 투쟁도 아니고, 또 죽어라 싸우는 단순한 군사적 공격과도 다르다. 우수한 지휘자는 먼저 모략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을 중시한다. 피를 흘리지 않고 완전한 목적에 이르는 것이다.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전국책’. 당나라 곽자의는 변방 민족 30여 만이 쳐들어와 위기에 빠진 상황에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외교로 나라를 구했다(오른쪽).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전국책’. 당나라 곽자의는 변방 민족 30여 만이 쳐들어와 위기에 빠진 상황에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외교로 나라를 구했다(오른쪽).

빌헬름 2세의 한탄

기원전 204년 한신(韓信)은 조(趙)를 멸망시킨 다음 조나라 광무군(廣武君)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대를 쉬게 하고 조나라 백성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말 잘하는 변사(辯士)를 연(燕)나라에 보내 곧 연나라를 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한편, 군의 위세를 한껏 떨쳐 보임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연을 굴복시켰다.

‘구당서(舊唐書)’ 곽자의열전(郭子儀列傳)에 보면 715년 토번(吐蕃), 회흘(回紇), 당항(黨項), 강혼(羌渾), 노자(奴刺) 등 변방 민족과 산적 임부(任敷), 정정(鄭庭), 학덕(학德), 유개원(劉開元) 등이 3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당을 공격한 기록이 나온다. 당나라 수도는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조정에서는 황급히 곽자의를 불러 군대를 맡겼다. 곽자의는 지금 병력으로는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곽자의는 상대가 대부분 자신의 옛 부곡(部曲 · 주로 수공업자나 범죄자들을 따로 모아 살게 한 정치 · 행정 단위)과 관련이 있고, 또 평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자가 많기 때문에 저들이 차마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곽자의는 몸소 몇 명만 거느린 채 회흘 진영으로 달려갔다. 회흘의 추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에서 내려 곽자의에게 절을 올렸다. 곽자의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솔직 담백하게 약속을 어긴 그들을 나무랐다. 추장들은 사과했고, 곽자의는 곧 그들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한편, 비단과 같은 재물을 줘 환심을 사고 애당초 맺은 동맹을 회복했다. 회흘과 토번 사이의 알력을 이용해 회흘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토번을 고립시켜 물러갈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당나라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위기는 해소됐다.

손자의 ‘상병벌모’ 사상은 중국 수천 년 역사상 정치 · 군사 영역의 투쟁에 엄청난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여러 나라에도 상당한 파급력을 미쳤다. ‘손자신연구(孫子新硏究)’ 총론편에는,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실각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손자병법을 읽은 후 왜 좀 더 일찍 이 책을 못 봤는지 한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대 전쟁이 어떻게 발전하든 ‘상병벌모’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욕심엔 끝이 없다”

상대의 모략, 즉 전략을 분쇄하지 못했다면 그다음 차선책은 ‘벌교(伐交)’다. 적의 외교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손자는 무기로 정복하는 ‘벌병(伐兵)’이나 성을 공격하는 ‘공성(攻城)’보다 벌교를 우위에 뒀다.

기원전 630년, 진(晉)의 문공(文公)과 진(秦)의 목공(穆公)은 군사를 이끌고 정(鄭)을 포위했다. 대군이 국경을 압박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정나라의 문공(文公)은 일지호(佚之狐)의 건의를 받아들여, 말을 잘하는 촉지무(燭之武)를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기로 했다. 촉지무는 야밤을 틈타 정나라 성 아래로 밧줄을 타고 내려와 두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목공의 군영으로 달려가 대성통곡하며 목공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목공을 만난 촉지무는 이렇게 말했다.

“이웃나라 진(晉)을 넘어 정나라 땅 한 덩어리를 차지해서 자기 읍으로 삼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는가. 어째서 정나라를 멸망시켜 진(晉)의 강역을 넓혀주려 하는가. 진(晉)의 힘이 증대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진(秦)의 세력이 약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정나라를 동쪽 지역의 주인으로 그대로 남겨둬 당신네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쉬어 갈 땅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좋지 않은가.

과거 진(晉) 혜공(惠公)은 진(秦)의 힘을 빌려 귀국해 군주가 됐고, 일찍이 허(許)나라는 초(焦), 하(瑕)의 땅으로 혜공에게 보답했는데도 귀국 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진(晉)의 욕심에 끝이 있을 것 같은가. 동쪽으로 우리 정나라를 차지하면 서쪽으로 확장하려 할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쪽은 다름 아닌 진(秦)이다. 그러니 두루두루 잘 살피기 바란다.”

진 목공은 촉지무의 얘기를 듣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즉시 정나라와 동맹을 맺는 한편, 세 사람의 대장군을 정나라에 남게 해서 정나라 방위를 돕게 하고는 자신은 친히 주력 부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진(晉)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자범(子犯)은 진(秦)나라 군대를 추격하자고 주장했다. 진 문공은 이에 이렇게 답했다.

“그건 안 된다. 당초 진 목공이 나를 도운 것은 남의 힘을 빌려 남을 치자는 것으로, 그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동맹국을 잃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 두 나라는 본래 동맹국이다. 진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과 동맹을 맞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진정한 무력의 덕이 아니다. 그러니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

‘구주의 목구멍’

전쟁이 발발했다고 해서 ‘벌교’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강대한 군사 · 정치력 뒤에 탄탄한 외교적 역량이 도사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현대 전략가들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춘추시대 중원에 위치한 정나라는 춘추 초기 장공(莊公, 기원전 8세기 중반) 때만 해도 강대국으로 행세했으나 그 뒤 정변 등으로 국력이 쇠퇴해 주변 강대국들에 시달림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특히 7세기 중반 목공(穆公) 이후 70년 동안 기록에만 30차례 이상 타국의 침공에 시달릴 정도로 쇠약해졌다.

정나라는 지리적으로 중국의 중심에 해당하는 중원에 위치해 국력이 강할 때는 주변국들을 두루 잘 아우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수시로 주변 강대국들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구주의 목구멍’이란 별명까지 붙었겠는가.

특히 당시 북방의 강대국인 진(晉)과 남방의 강국인 초(楚)의 눈치를 많이 보았는데, 이 때문에 ‘조진모초(朝晉暮楚)’라는 고사성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아침에는 진나라로 달려갔다가, 저녁에는 초나라로 달려가야 하는’ 고달픈 신세에 비유한 것. 강대국 틈에 끼어 이들의 눈치를 보고 그 간섭에 시달려야 하는 약소국의 상황을 대변하는 말이다.

정나라 최고의 정치가이자 ‘춘추일인(春秋一人)’이라는 극찬을 받은 정자산은 이런 상황에서 정나라의 정치와 외교를 맡았다. 외교 방면에서 자산은 약소국의 권익을 단호하게 지키는 원칙을 고수했는데, 이는 철저한 준비와 외교전략에서 비롯됐다. ‘좌전’은 자산이 어떤 정치와 외교를 행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나라가 제후국들의 일에 나설 때면 자산은 여러 나라가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자우에게 물어 그에게 좋은 문장으로 공문을 만들게 하고, 비심과는 수레를 타고 교외로 나가 계획하고 있는 일의 성사 여부를 묻고, 돌아와 풍간자에게 판단하게 했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되면 자대숙을 불러 집행하게 했다. 이렇게 빈객들을 응대했기에 일을 그르치는 적이 드물었다.

손님은 집에서 접대하듯

자산의 외교활동은 전문가들의 세심한 조언을 거쳐 이뤄졌고, 이 때문에 빈틈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강대국들도 자산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다음의 일화는 자산이 약소국 정나라의 위신을 어떻게 어떤 논리로 세웠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산이 간공(簡公)을 보좌해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노나라 양공이 죽는 바람에 간공은 진 평공을 못 만나고 영빈관에 체류하게 됐다. 그러나 영빈관이 좁아 가져온 공물을 다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이에 자산은 주저 없이 영빈관 담장을 허물게 하고는 수레와 말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진나라의 사문백이 와서 다른 나라 손님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런 외교적 결례를 저질렀느냐며 따졌다. 그러자 자산은 이렇게 맞받았다.

“작은 우리나라는 큰 나라들 틈에 끼어 있어 큰 나라들이 툭하면 공물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백성들을 쥐어짜서라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왔다. 그런데 진나라에 도착했는데 국군은커녕 담당관도 만나지 못했다. 기약이 없으니 가져온 공물을 풀 수도 없고, 밖에서 이슬을 맞게 할 수도 없으니 걱정이다.

그 옛날 귀국의 문공은 궁실은 형편없었어도 손님을 맞는 관사는 으리으리했다. 지금처럼 이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 영빈관은 종들이 사는 집 같다. 좁아터져서 가져온 공물을 들일 곳조차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담장을 허물어서라도 귀한 공물을 잘 간수하려 한 것이다. 공물을 다 진상하고 허문 담장을 고쳐놓고 돌아가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사문백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상관에게 보고했고, 상관은 즉시 사과했다. 평공도 간공에게 잘못을 인정하며 후한 예로 접대하는 한편 영빈관을 예전처럼 크게 만들어 외국 사신들을 맞이했다. 자산의 당당한 외교 덕분에 ‘손님을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접대한다’는 ‘빈지여귀(賓至如歸)’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이는 역대로 중국이 사신을 대우하는 기준이 됐다.

고슴도치 같은 강소국


‘외교의 힘’으로 진(晉)과 초(楚) 사이에서 정(鄭)나라를 지킨 정자산.
‘외교의 힘’으로 진(晉)과 초(楚) 사이에서 정(鄭)나라를 지킨 정자산.
춘추시대 정나라는 수많은 전쟁의 발단이 되고 전쟁에 동원되는 불안하고 고달픈 신세였다. 정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그 어떤 나라에도 버릴 수도, 그렇다고 차지하기도 쉽지 않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자산 이전까지만 해도 정나라 정치가들은 이런 지리적 조건을 활용할 줄 몰랐다. 자산은 이런 조건을 활용한 것은 물론 주변국들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 그들의 내부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이를 외교전략으로 이용함으로써 전쟁 발생을 억제했다.

자산은 또 강대국에 바치는 공물, 즉 전쟁 물자의 양을 대폭 줄였다. 그가 영빈관 담장을 허문 것은 이런 과도한 공물 요구에 대한 항의와 다름없었다. 자산이 이런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제정치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자국의 현실에 맞는 외교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자산은 ‘약소국 정나라의 생존’이라는 기본 전제 아래 확고한 외교전략을 수립했다. 제1 목표는 ‘침략당하지 않는 것’, 제2 목표는 ‘강대국의 착취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기존 국제정세의 틀에 틈을 내 정나라의 생존을 지속시키고 나아가 정나라를 강대국은 아니더라도 강소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산은 상대국이 삼키지도 못하고 공격하지도 못하는 고슴도치와 같은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다(공원국, ‘춘추전국 이야기 4’ 참고).

자산의 외교전략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내정 개혁이다. 자산은 약 20년 정나라의 정치를 주도하면서 무엇보다 귀족들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치(法治)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를 ‘형정(刑鼎)’이라 하는데, 이런 획기적인 개혁 조치는 내부는 물론 주변국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렀다.

하지만 정자산 사후 불과 30년 만에 거의 모든 나라가 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자산은 천하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이다.

富·권력? 먼저 인간이 돼라


자산은 상하의 민심과 여론을 수렴하고 소통함으로써 민심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미신을 타파하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백성들의 적극성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 지도자와 관리의 자질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없으면 민심도 얻을 수 없고 부국강병도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녹봉(재력)과 벼슬(권력)은 자신을 비호하는 수단이 된다. 나는 배운 다음 벼슬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았어도 벼슬한 다음 공부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부와 권력을 원하는 자는 먼저 인간이 되라는 자산의 일갈이다. 자산이 외교에서 보여준 자신감은 이런 내정 개혁과 하나로 뭉친 민심이라는 뒷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우리 외교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사기에 등장한 수천 년 전 춘추시대 외교가들의 사례를 보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우리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고슴도치처럼 강소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그것을 가능케 할 인재들은 있는가. 그런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그것을 운용할 줄 아는 정치인과 통치자는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부와 권력을 자신을 비호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 인간이 된 지도자는 있는가.

자산이 우리를 떠나 죽었으니 백성들은 앞으로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子産去我死乎 民將安歸)?

자산에 대한 사마천의 짧지만 강렬한 촌평이다(‘사기’ 순리열전 편).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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