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아의 정원의 속삭임]지금 흙 속에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8일 03시 00분


야생과 달리 정원에 떨어진 낙엽은 제때 치우지 않으면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필자의 집 담장 너머로 자라고 있는 감나무. 오경아 씨 제공
야생과 달리 정원에 떨어진 낙엽은 제때 치우지 않으면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필자의 집 담장 너머로 자라고 있는 감나무. 오경아 씨 제공
오경아 오경아디자인연구소 대표
오경아 오경아디자인연구소 대표
속초 집 마당이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가을이 되어 정원이 한산해질 만도 한데 상황은 전혀 다르다. 담장 안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감나무 네 그루와 밤나무 한 그루가 연일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대로 두면 화단에 쌓여 좋은 거름이 되지 않느냐’고 묻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자연의 숲 속이라면 거대한 생태구조에 의해 충분히 그리 될 일이지만 작은 정원에서는 낙엽이 썩으며 균의 활동이 증가해 다른 식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낙엽을 되도록 잘 걷어내 한곳에 모은 뒤 1년 정도 삭혀 다시 거름이 되었을 때 화단의 거름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과학자들은 지구가 지금껏 생명체가 살아있는 행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미생물의 분해 작용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생각해 보면 생명을 가진 것이 썩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썩지 않고 분해되지 않는 것이 지구엔 엄청난 재앙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을 하는 존재를 우리는 거의 모른다. 그건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땅 밑에 얼마나 많은, 어떤 생명체가 있는지 알 길 없는 미생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1800년대 아일랜드는 45년간 인구가 무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 많은 인구가 먹어야 할 곡물이 턱없이 부족하자 아일랜드는 안데스 산맥이 자생지인 감자를 심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인구의 70%가 감자 농사를 지었으니 그 당시 감자의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런데 1845년부터 감자 농사에 이상이 생겼다. 그해 유난히 비가 많고 햇살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흐려지면서 감자가 썩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알을 맺지 못하고 흐물거리며 썩어나갔다. 농부들은 이것을 날씨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리고 다음 해를 기다리며 다시 또 감자를 심었지만 감자는 여전히 같은 증상으로 수확에 실패했다. 이렇게 5년 동안 감자 농사는 계속 실패하고 결국 아일랜드는 전 국민이 배고픔에 허덕이는 대공황 사태를 맞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일랜드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대규모 이주를 해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시 아일랜드에는 감자 괴담이 횡행했다. 신의 저주가 감자에 내렸다, 아일랜드 날씨가 저주를 받았다 등이었다. 그러나 감자 파동의 결정적인 원인은 200년이 지난 후에야 실체가 정확하게 드러났다. 그건 땅속에 살고 있는 기생 미생물 탓이었다. ‘워터몰드’라고 불리는 일종의 균과 비슷한 미생물이 감자를 숙주로 삼아 영양분과 수분을 탈취했기 때문이었다.

감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600년대 네덜란드는 튤립 탓에 국가경제가 몰락하는 일을 겪게 된다. 당시 귀족들은 터키 인근이 자생지인 튤립이 유럽에 들어오자 그 아름답고 화려한 꽃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도를 넘는 사재기가 일어나면서 희귀종 튤립 알뿌리 하나가 일반 노동자 1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고액에 거래되는 투기현상이 일어났다.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뿌리의 알뿌리 투자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1636년 튤립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이유로 튤립의 잎이 마르면서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됐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튤립으로 네덜란드는 연쇄부도가 일어났고 결국 국가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맞게 된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밝혀낸 이때의 튤립 이상도 결국은 ‘모자이크 바이러스’라는 미생물 탓이었다.

그때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이 미생물의 세계는 우리에게 까마득히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다. 단순히 식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 속담에 ‘식물을 돌보는 것은 흙이고, 정원사는 흙을 돌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정원사는 흙을 잘 들여다보고 그 흙이 식물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흙을 향상시키라는 의미다. 바로 이 가을은 어느 때보다 흙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시기다. 이미 영양분이 고갈된 흙이라면 흙을 바꿔주는 일도 요즘의 일이다. 또 낙엽이 지는 이 시기에 정원에서는 튤립과 수선화, 알리움 등의 알뿌리 식물을 심는다. 지금 식물시장엔 싱싱한 알뿌리 식물이 가득하다. 알뿌리는 화분에 심어도 다음해 봄 예쁘게 꽃대를 올리고 탐스러운 꽃을 피우니 잊지 말고 내년 봄을 기약해보자.

오경아 오경아디자인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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