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자식들 가슴에 묻은 ‘장수 王’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3일 03시 00분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묘지문-제문에 담긴 영조의 비통

최근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사도’를 비롯한 대중문화 속에서 조선 영조(1694∼1776)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모습이 주로 부각된다. 내면의 갈등이 묘사돼도 그는 비정한 아버지다.

그러나 영조는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가족의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정비(正妃) 2명 중 1명, 후궁 4명 중 2명이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모두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생전에 아들 2명을 모두 잃었고, 12명의 딸 중 9명을 앞세웠다. 이는 영조가 82세까지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태어난 순서대로 떠나는 것이 아닌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육친을 잃은 슬픔을 그는 어떻게 달랬을까. 영조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손수 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 소장의 제문과 묘지문(墓誌文)을 살펴봤다.

“아침에는 나를 대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깊이 숨어서는 말을 않으니, 그날 광경의 비참하고 처절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따뜻한 말과 낭랑한 음성을 어느 날에 다시 들으며, 온화한 모습과 부드러운 얼굴을 어느 때에 다시 본단 말인가.”

영조가 왕세제 시절인 27세 때(1721년) 후궁 소훈 이씨(정빈으로 추증)를 잃고 쓴 제문이다. 소훈 이씨는 영조의 첫 자식인 향염(화억옹주로 추증) 등 두 딸과 장남인 효장세자를 낳은 인물이다. 영조와 동갑내기로 8세에 궁에 들어온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영조의 ‘솔 메이트’였다. 이 제문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라는 절절한 외침으로 끝맺는다.

이에 앞서 영조는 3년 전인 1718년 돌이 안 된 향염을 잃었다. 영조가 쓴 광지(壙誌·무덤에 넣는 글)에는 “딸은 성품이 영민하고 용모가 청수하였다. 아아! 안타깝구나. 사무치는 아픔을 어이 견딜까. 무술년 8월 아비 연잉군이 눈물을 뿌리며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영조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34세 때(1728년) 장남 효장세자를, 57세 되던 해(1751년)에는 며느리 효순현빈 조씨(효장세자의 아내)를, 58세에는 첫 손자였던 세 살배기 세손(사도세자의 장남)을 잃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23년을 궁에서 지낸 며느리 조 씨와 영조는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나를 먹이려고 직접 스스로 밤을 삶고는 했는데 영영 가던 날에도 삶아놓은 것이 여전히 쟁반에 남아 있었으니…억장만 무너질 뿐이다”라고 했다.

영조는 말년에도 계속 가족을 잃고 제문과 비문을 썼다. 63세 때(1757년)는 정비 정성왕후를 잃었고, 68세에는 기대가 컸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자책과 회한이 담긴 묘지문을 남겼다.

“13일의 일(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일)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이 글은 사신(詞臣·글 짓는 일을 담당하는 신하)이 대신 지은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여, 이 글을 가지고서 나에게 유감이 없을지어다.”

칠순이 넘어서는 40년 가까이 해로했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다. “오호라!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친히 빈의 묘표, 명정, 신주를 모두 썼으니 정말 뜻밖이다.”

영조의 제문, 묘지문 등을 조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책임연구원은 “영조가 쓴 묘지문은 지석을 무덤에 묻기 전 탁본해 지금도 볼 수 있다”며 “왕이 제문 등을 직접 지은 일이나 문장에 슬픔과 애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조#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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