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3금(禁)’의 나라다. 금송(禁松), 금육(禁肉), 금주(禁酒)다. 소나무 베지 마라, 쇠고기 먹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는 뜻이다. 모두 농사를 잘 짓게 하고 곡식을 아끼기 위해서 만든 원칙이었다. 먹고사는 것은 농사에 달려 있다. 소는 농사에 필수적이다. 식용이 아니다. 개인의 도축은 원칙적으로 금했다. 궁중 제사나 외국 사신 접대 등에만 제한적으로 쇠고기를 사용했다. 소의 밀도살은 중죄였다. 초범이라도 곤장 100대에 징역 3년의 벌을 받았다. 밀도살로 발각되면 온 가족이 천민이 되어 역참(驛站)에 노비로 배속되었다.
18세기 이후 영조,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와 민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드디어 국왕(정조)이 신하들과 ‘쇠고기 파티’를 벌이고 민간에서도 고기를 먹는 일이 시작된다. 조선의 상층부에서는 중국의 ‘쇠고기 먹는 풍습’을 이야기한다. “중국에서는 음력 10월 초에 쇠고기를 구워 먹는다. 난란회(煖暖會)다. 이 풍습은 송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중국에서도 먹는다면서 오랑캐의 청나라 풍습을 따른다고 하기는 조금 멋쩍다. 송나라 때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드디어 고기를 먹기 시작한다. 홍석모도 ‘동국세시기’에서 ‘쇠고기 구워 먹는 풍속’을 이야기한다.
단원 김홍도의 8폭 병풍 ‘사계풍속도’ 중 ‘설후야연(雪後野宴)’이 있다. ‘눈 온 다음에 연 파티’라는 뜻이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둘이다. 여자는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기생이다. 그림 중간에 불판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중간의 고기 불판에 쏠린다. 정조도 “신하들과 난로회(煖爐會)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1745년생으로 정조 시대를 살았던 김홍도도 민간의 쇠고기 굽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림 중 불판을 보면 중간에 홈이 있고 테두리에서 고기를 굽는다. 중간의 움푹한 홈에는 채소와 장(醬)을 넣고 끓인다. 고기를 구운 다음, 중간의 홈에 있는 채소와 장의 물기에 찍어 먹는다. 어느 순간 움푹한 중간 부분이 커진다. 테두리에 고기를 굽는 대신 움푹한 부분에 고기, 채소, 장을 모두 넣고 끓인다. 그릇 모양은 마치 조선시대 군졸들의 벙거지 같다. 벙거지는 전립투(氈笠套)다. 여기에 섞는다는 뜻의 ‘골(滑)’을 붙이면 ‘전립투골’이 된다. 둥글고 움푹한 그릇에 쇠고기, 각종 채소, 장을 섞은 다음 끓인다. 오늘날의 전골이다. ‘전골’은 ‘전립투골’에서 비롯된 말이다.
전골 그릇은 중간이 움푹하고 테두리가 짧다. 이 그릇을 뒤집으면 오늘날 ‘서울식 불고기 판’이 된다. 중간은 불룩하게 솟아오르고 테두리에는 짧고 얕은 홈이 있다. 불룩한 부분에 작은 구멍을 여러 개 뚫는다. 이 구멍을 통하여 불기는 올라오고 국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불기에 직접 닿은 고기에서는 ‘불 맛’이 난다. 석쇠를 만드는 가는 철사가 귀하던 시절, 직화(直火)구이 대신 불 맛을 느끼며 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 불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은 고기 군데군데 가뭇하게 탄 흔적을 기억한다. 가장자리 얕은 부분의 국물에 밥을 비벼 먹어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불 맛과 더불어 달짝지근한 맛을 잊지 못한다.
불고기 판의 둥근 부분 중간에 큰 불구멍을 만들고 테두리 부분을 깊고 넓게 하면 신선로 그릇이 된다. 신선로는 ‘신선(神仙)’과는 관계가 없다. 중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형태의 그릇(新設爐·신설로)’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는 주장이 정확하다. 쇠고기 먹는 일이 잦아지면서 중국에서 새롭게 받아들인 그릇이 바로 신선로(新設爐) 그릇이다.
‘궁중 신선로’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신선로는 궁중에서만 먹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전통 음식도 아니다. 비슷한 음식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승기악탕(勝技樂湯)’도 있다. “기생보다 더 즐거움이 큰 음식”이라는 뜻이다. 고기 대신 도미 등 생선을 쓰기도 한다. 음식은 비슷하다.
‘분당새댁’ 탕웨이가 출연한 중국 영화 ‘무협’(2011년·천커신 감독)은 1900년 언저리의 중국 내륙 산악지방이 무대다. 탕웨이, 전쯔단, 진청우가 깊은 산속의 움막에서 식사하는 장면에 낡고 보잘것없는 신선로 그릇이 보인다. 싱가포르, 홍콩 등지의 리어카 음식점(호커·HAWKER)에서 볼 수 있는 ‘스팀보트(STEAMBOAT)’가 바로 신선로 그릇이다. 설마 정조 시대의 신선로 그릇이 중국으로 건너가 산골 음식의 빈한한 그릇이 되었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