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채집이라는 숙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식물을 뿌리에서 꽃 혹은 씨앗까지 온전하게 채집해 책 사이에 넣어 사나흘 눌러놓으면 수분이 완전히 빠져나가 보관하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주변에서 보는 흔한 잡초에서 희귀해 보이는 식물까지 다양한 수종을 모아서 한 권의 스크랩북을 만들어내곤 했다. 요즘도 이 숙제를 해가는 초등학생이 있겠지만 이제는 식물채집이 어렵다. 도시 속에서 식물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진 마당에 야생 상태의 식물을 채집해 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채집이 본격화된 것은 영국의 자연학자 찰스 다윈이 활동했던 1800년대였다. 당시 영국은 정치적으로는 인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으로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돼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미지의 대륙에서 쏟아지는 문물에 유럽 전체가 열광했다. 그런데 이 호기심 속에는 새로운 대륙에서 발견되는 식물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영국 귀족들은 앞다퉈 원예협회를 만들었고 얼마나 새로운 종의 식물을 알고 있는가, 혹은 키우고 있는가가 자신의 교양을 보여주는 잣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원예협회들이 가장 많이 한 일은 새로운 식물을 찾아내기 위해 ‘식물헌터’들을 파병하는 일이었다. 파병된 식물헌터들은 신대륙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식물을 채집하고 그 채집본을 협회로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식물헌터들은 정찰병으로 오해받아 원주민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오지탐험 중에 실종되는 일도 허다했다.
1839년 스물두 살이던 조지프 후커도 이 식물헌터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의과대학을 마친 후 외과의사로 영국 해군의 탐험선에 동행했는데, 식물 열정이 남달랐다. 캐너리 아일랜드와 남아프리카를 통과하는 긴 탐험에서 돌아온 후 그는 식물학 공부를 이어갔고 훗날 드디어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의 수장이 됐다. 그의 이름은 지금으로서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윈의 가장 큰 조력자이자 친구였다. 그는 다윈이 보내온 수많은 식물을 분류하고 분석해 다윈이 밝히고자 했던 식물의 진화론을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 후커가 한 일은 다윈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식물을 채집본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그 특징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의 연구가 중요했던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식물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그의 식물채집 연구를 통해 정확하게 가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후커가 한 일을 잇고 있는 큐가든은 오늘날에도 식물분류학이라는 독보적인 과학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식물이 발견되면 큐가든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확인받는데 운이 좋다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최초의 식물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이때 다윈과 후커가 남겼던 식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여전히 갖고 있다. 단순히 식물이 얼마나 예쁜 꽃을 피우는지만을 보지 않고 새로 나타난 수종에 열광하고 낯선 빛깔과 잎의 모양을 지닌 식물들을 앞다퉈 사는 데 주저함이 없다.
요즘 우리에게도 정원의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그런데 단순히 예쁜 정원을 만들고, 보기 좋은 식물을 심고, 공기 정화를 위해 책상 위에 실내 식물 하나 두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정원문화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기는 참 어렵다. 정원문화의 뿌리를 지탱하고 있는 식물에 대한 깊은 연구와 호기심, 사랑이라는 바탕이 있어야 정원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다.
우주인이 화성에 홀로 남겨진 뒤 그곳에서 식물을 키워 생존했다는 소설이 인기를 끌더니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쯤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지구를 버리고 화성까지 가서 식물을 심어야 할 일이 벌어질 것도 같다. 그러기 전에 지금의 이 지구에서 살아주고 있는 소중한 식물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지. 가을이 깊어간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화분에서도 식물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씨앗을 맺고 있다. 지금이 딱 이 씨앗을 채집할 수 있는 좋은 시기다. 씨앗은 봉투에 담아 보관하는 것이 좋다. 그 위에 잊지 말고 씨앗을 채취한 곳, 날짜, 씨앗의 이름을 적은 뒤 냉장고 아래 칸 혹은 김치냉장고에 보관한 뒤 내년 봄 그 씨앗을 꺼내 심어 보자. 내년 봄 분명히 지구를 생명의 행성으로 지키고 있는 식물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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