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는 옛날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라 했다. 하루는 탁발승이 쌀을 구걸하러 왔는데 부자가 똥을 퍼 주었더니 살던 곳이 갑자기 푹 꺼져서 호수가 되었고, 쌓아 둔 곡식은 모두 자그마한 조개로 변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났다. 조개 맛이 달고 향긋해 요깃거리가 되므로 이 지역 사람들은 적곡합(積穀蛤)이라 한다. 봄·여름이면 사방 먼 데서부터 남자는 등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서 조개를 주우려고 사람들이 길에 줄지어 있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도 기와 조각과 그릇 따위가 있어서 자맥질하는 이들이 가끔 줍는다.” 》 이 얘기는 강원 강릉시 경포호에 얽힌 전설로 조선 후기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나온다. 인색한 부자가 스님에게 똥을 시주했다가 벌을 받아 집이 연못이 됐다는 ‘장자못’ 전설은 전국 곳곳의 호수에도 전해 내려오지만 이 전설은 조개와 관련된 점이 특별하다.
1751년 저술된 최초의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문학적 성격에 주목한 논문이 처음 나왔다. 16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경기도 실학박물관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 ‘사람과 땅, 택리지가 그리는 인문지리’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각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적극 기록한 택리지는 구비문학과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라고 말했다.
안 교수의 발표문 ‘택리지의 구전 지식 반영과 지역전설 서술’에 따르면 택리지에 줄거리가 조리 있고 분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전설은 약 40개다. 개중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얘기도 적지 않다.
“강경에 채운산 한 개 봉우리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봉우리 위에는 정기를 길러주는 영천(靈泉)이 있어서 백제 때 의자왕이 연회를 베풀며 놀던 곳이라 전해 온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에 관한 서술이다. 백마강 주변 명승들에 의자왕이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꽤 많지만 지금 채운산에는 관련 전설이 없다. 그는 “이 지역에는 우물이 없어 땅에 독을 묻어 빗물을 침전시켰다가 마시는데, 물맛이 좋고 병이 낫는다”는 얘기도 실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이 강경에 상당 기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며 “택리지에는 이중환이 현지에서 직접 채록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택리지에 은둔자에 관한 전설이 많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여섯 군데나 나온다. 택리지는 경남 남해군을 설명하며 “섬 안에는 금산(錦山)이 있고, 그 골짜기는 바로 최고운(孤雲은 최치원의 자)이 노닐던 곳이며,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고 적었다. 안 교수는 “최치원은 정치·경제적 지위를 상실한 사대부가 서울을 벗어나 살 만한 곳(士大夫可居處)을 찾을 때 참고한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모델”이라며 “남인 간관(諫官)으로 투옥을 거듭하다 평생 금고(禁錮·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벌) 된 이중환 자신의 처지도 택리지 서술에 투영됐다”고 말했다.
최근 산책로로 사랑받는 서울 성곽에 얽힌 얘기도 흥미롭다. 택리지에는 “외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를 미처 못 정했다. 어느 밤 큰눈이 내렸는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고 안쪽은 녹았다. 태조가 기이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다”고 나온다.
안 교수는 “이중환은 신이성(神異性)과 허구성을 경계하는 사대부 의식, 유가적 합리성에서 벗어나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채록한 구비문학의 기여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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