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김수영(1921∼1968)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밤에 한강을 건너노라면, 가로등 빛들은 장검처럼 어두운 수면에 꽂혀 있다. 그것은 혁혁하게 빛난다. 누구에게나 남다른 걸 이루어 뚜렷이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당대의 어두운 현실을 홀로 짐 지기라도 하듯 살았던 시인 역시 그랬을 것이다.
타성에 젖은 무력한 삶에도 내일이 있을까. 취한 몸 무너진 마음을 애써 가누며, 그는 그에게 서둘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게 어떤 것이든 ‘꿈’의 씨앗은 이 메마른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저 ‘도덕경’의 화기광동기진(和其光同其塵)이 일러주듯 티끌과 더불어 뒹구는 ‘인생’의 주름과 고비에 빛이 깃든다고 그는 믿어보려는 듯하다.
그의 현실이 온통 답이 없는 것이기에 그의 ‘절제’에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려는 자의 안간힘이 배어나는 듯하다. 그것은, 일천만 거주민의 눈물과 웃음, 피땀과 고름과 똥오줌과 아우성을 받아 삼키고도 신음 하나 없이 수도 서울을 흘러가는 한강을, 역시나 묵묵히 바라보는 사람의 터질 듯한 가슴을 떠올리게 한다.
공명은 일신의 얼룩이고 업적은 허망의 탑을 쌓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걸까. 짐작건대, ‘절제’ 너머는 어떤 포기일 것이다. 참음 없이는 업적도 꿈도 없다. 지금은 어두운 시대이다. 절제와 참음 속에 애타게 ‘꿈’을 쟁여 두어야 할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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